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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한국대중음악사13

일본 군가의 유입과 음악교육 독립군들이 군가로 차용한 멜로디는 기독교의 찬송가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일본 군가, 그 다음이 서양의 명곡들이다. 이런 예는 국내 대중음악사에서 서양 음악을 수용하던 초기에 일본의 군가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청일전쟁(1894 ~ 1895), 러일전쟁(1904 ~1905)을 계기로 많은 일본의 군가들이 국내에 들어왔고 유행했다. 이 일본 군가는 기독교, 그 중 개신교의 찬송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물론이고 반일과 항일의 내용을 담은 노래에서도 다수 차용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런 노래들의 근원을 모르는 상태에서 점점 국민 정서에 적합한 보편적인 노래들이 되기 시작던 것이 후세대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이로 인해 이런 노래들은 우리 근대 음악의 원형으로.. 2019. 1. 30.
애국가 운동 대한제국은 의전과 외교 행사를 위해 양악대를 만들고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 애국가를 공포했다. 고종은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가의 제정을 명했고 이에 궁중의 학자들이 모여 작사를, 양악대의 지휘자인 프란쯔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가 작곡을 했다. 정부가 이 곡의 악보를 공식적으로 배포했음에도 현재는 가사와 선율이 조금씩 다른 악보 10여 종이 전해져 온다. 아마도 일제 통감부가 이 곡을 금지 시킨 후 전국 각지에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구전되어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곡 외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여러 편의 애국가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개화파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만들었다. 외국 곡의 멜로디를 사용해 가사만 붙인 .. 2019. 1. 29.
양악대 1897년 8월 12월부터 우리나라는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국왕의 지위를 황제로 격상시켰다. 정부는 의전 행사를 위한 국가적 차원에서 서양 음악을 수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1900년 12월 19일 신식 군대 내에 양악대를 창설했다. 지휘자로는 독일 출신으로 일본에서 양악대를 육성한 경험이 있는 프로이센의 육군 군악대장 프란쯔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를 초빙했다. 프란쯔의 양악대는 1901년 9월 9일 고종의 생일 행사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 프란쯔는 양악대를 운영하면서 음악 인재를 육성하려고 하였고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세계화를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어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1907.. 2019. 1. 28.
초기의 서양음악 정보 유입 사례 문헌에 의하면 19세기 말 본격적으로 서양음악이 유입되기 전, 여러 경로를 통해 서양음악과의 접촉이 있었다. 일단 이론적인 혹은 문헌적인 소개를 살펴보면,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1581 ~ ?)은 음악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정보를 담은 라는 책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책은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Gioulio Aleni, 1582 ~ 1649)가 중국 황제의 명을 받아 저술한 것이다. 홍대용(1731 ~ 1783)은 중국의 베이징을 방문한 후 가톨릭교회에 설치된 오르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을 남겼고 박지원(1727 ~ 1805)은 서양음악에 대한 토론과 감상평을 에 담았다. 이덕무(1741 ~ 1793)는 에 단편적인 서양음악의 기초 이론을 소개했고 이규경은 오.. 2019.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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