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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4

서태지와 아이들 1집 - 서태지와 아이들 / 1992 과거에 있던 기존의 곡들에서 비트와 멜로디를 약간 가져와 샘플링 했던 그룹 마스(M/A/R/R/S)의 Pump Up The Volume이 히트하자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악기를 사용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전통적인 창작 방식에서 현존하는 음악을 누가 어떤 식으로 잘 꼴라쥬 하는 가의 문제로 변한다. 샘플링은 원작자의 거센 반발을 받았지만 그 흐름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완전히 정착되고 국내에서도 철이와 미애의 신철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 됨으로써 이 땅에도 대대적인 상륙이 시작되었다. 건국 이래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리며 순식간에 새로운 트렌드를 유행시킨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은 단순하지만 미묘한 감각을 요하는 샘플링의 승리였다. 지상 최대의 히트곡이 되어버린 난 알아요.. 2021. 2. 20.
교실 이데아 - 서태지와 아이들 Feat. 크래쉬 / 1994 교실 이데아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4년에 발표한 세 번째 앨범 에 수록된 곡으로 서태지가 작사, 작곡, 프로듀서를 맡았고 쓰래시 메탈록그룹 크래쉬(Crash)와 스크래치 세계 챔피언인 미국 출신의 디스크자키 DJ 큐버트(DJ Qbert)가 참여했다. 런-DMC(Run-DMC)의 Hollies Crew, 비스티 보이스(Beastie Boys)의 Pass The Mic 등과 "됐어" 부분이 비슷하다는 표절 시비가 있었다. 크리스 크로스(Kris Kross)의 The Way Of Rhyme과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It's Like That에서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의 부분은 런-DMC 것을 샘플링 한 것이다. 삼천리 자전거 레스포 광고, KTF 쇼 3탄, 교육부 공익.. 2017. 3. 8.
영턱스클럽(Young Turks Club, YTC) 서태지와 아이들은 해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여행으로 달랬다. 그러던 중 이주노가 라디오 DJ를 제의 받아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고 양현석도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둘은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이주노가 제작에 대한 포부를 밝히자 양현석은 서두르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주노는 투자라기보다 그룹 활동으로 쌓은 막대한 부에서 조금(2억이라고 밝혔다) 떼어 후배들을 위해 쓴다는 개념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실패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한현남, 송진아, 지준구에 원래는 양현석 라인이던 최승민을 스카우트 해 한 팀으로 묶은 이주노는 ING라는 기획사를 차리고 확실한 메인 보컬이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혼성그룹 투투에서 황혜영과 자리다툼 끝.. 2015. 9. 26.
서태지와 아이들 1992 서태지 19720221, 이주노 19670210, 양현석 19691202 그룹 시나위를 나온 서태지는 시퀀서로 곡 작업을 시작했다. 지독히도 기나긴 시간이 걸린 난 알아요의 데모는 놀랍게도 록 밴드의 주자가 가진 마인드와는 한참 떨어져 보이는 랩송이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MC 해머(Hammer),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등의 흑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말로 된 랩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힙합에 대한 정식코스를 밟기 위해서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으며(비록 춤 선생의 군 입대로 금방 깨졌지만), 데모 테이프가 완성 된 뒤에는 양현석과 그와 춤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던 댄스 황제 이주노를 맞아들여 댄스 팀을 만들었다. 이들의 데.. 2012.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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