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2017.04.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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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우리 음악계는 미국의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록음악을 체화해내기 시작한다. 일렉트릭 기타로 대변되는 그룹형 록 사운드는 신중현에 의해 토착화되기 시작했고 밥 딜런(Bob Dylan)식의 포크 록은 한대수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된 뒤 캠퍼스를 점령한 기타의 향연과 더불어 대학가에 수놓아졌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에 의해 폭발한 록큰롤, 록커빌리는 1970년대 들어 대중음악의 한복판에서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남진에 의해 전개된다. 남진은 당시 국내에 있었던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빠른 노래를 불렀고 가장 격렬한 춤을 선보였다. 서서 노래 부르는 것이 주 업무였던 가수에게 있어 춤이라 부를만한 것의 시작점을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의 첫 성공은 울려고 내가왔나라는 트로트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것은 후에도 그의 음악을 규정짓는 데 있어 장르상으로는 트로트로 몰고 가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목포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이미 부잣집 도련님으로 널리 소문이 났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음악에 심취했다. 그래서 전국의 지방을 도는 쇼와 유랑극단이 오는 날이면 온통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외동아들로 아버지의 심한 반대를 감당해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벌써 일찌감치 연예계를 향해 가고 있었으며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진학해 영화배우로서의 꿈에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그리고 꿈은 우회적으로 다가왔다. 중학교 때부터 닐 세다카(Neil Sedaka)의 Oh Carol, 폴 앵카(Paul Anka)의 Diana, Crazy Love 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그는 대학시절 누나, 친구들과 함께 야유회를 간 뒤풀이 자리에서 비공식적인 첫 무대를 갖게 되는데, Your Cheating Heart을 불러 레스토랑 손님들에게 찬사와 앙코르를 받아냈고 다시 Pretend를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로서의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한 달 후 남진은 밴드마스터를 통해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들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받는다. 한동훈은 그를 청계천에 있던 자신의 학원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Autumn Leaves를 부르며 연습생으로서의 시절에 돌입한다. (후에 그는 처음에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수 학원에 가는 걸 망설였지만 학원의 한 예쁜 여학생 때문에 등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연습생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드디어 1965한동훈이 만든 서울 푸레이보이로 가요계에 정식으로 데뷔한다. 그러나 이 꿈 많은 청년의 기대는 라디오라는 매체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 당하고 만다. 당시에는 현미, 한명숙, 최희준 등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인기여서 남진의 깔끔한 목소리가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음반만 발매하면 인기스타가 될 줄 알았던 젊은 청춘은 쓸쓸히 낙향할 수 밖엔 없었다. 

두 번째 기회는 낙향해 있을 때 한동훈이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손진택 사장에게 소개하면서 찾아온다. 소개를 통해 음반사의 전속가수 계약을 맺은 남진은 작사가 김중순과 작곡가 김영광이 만든 연애 0번지로 두 번째 음반을 발매하고 첫 작품의 실패를 홍보의 부재라고 생각하고 직접 방송사 PD들에게 음반 돌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그 노력에 힘입어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에도 불운이 찾아왔다. 히트의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한 그 곡을 국가는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켜 버린 것이다. 발표된 지 3개월 만의 일 이었고 남진은 또 다시 좌절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두 번이나 앨범을 접게 되자 남진은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고 매일같이 술로 보냈다. 

실의에 빠진 그를 위로하러 올라 온 남진의 어머니는 그 앨범에 있던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란 곡을 추천하며 다시 도전해 볼 것을 권한다. 별다른 수가 없었던지라 남진은 밑져야 보전이라는 심정으로 다시 홍보를 시작한다울려고 내가 왔나김영광에게 받을 때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곡이고 장르적으로도 평소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트로트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곡은 1965년 최고의 히트곡 중 한 곡이 되었으며 남진이란 이름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하는 곡이 되었다. 그리고 울려고 내가 왔나 스타일의 곡들도 시장에 깔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트랜드를 형성한 것이다. 트로트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사랑하고 있어요란 곡도 히트시킨다. 비록 왜색으로 검열에 걸리긴 했지만 남진을 트로트가수의 신성으로, 이미자의 대를 이을 가수로 평가 받게 했다. 

전속사를 지구로 옮기고 1966년엔 작곡가 박춘석을 만나 가슴 아프게를 발표한다. 이 곡은 울려고 내가 왔나의 인기를 훌쩍 뛰어 넘은 것뿐만 아니라 이미자의 아성을 뛰어넘어 그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으로 남진을 최고 인기가수의 반열에 등극시킨 곡이다. 이 곡은 당대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트로트 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곡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1967년엔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며 명실상부하게 메인스트림에 안착한다. 

그를 한 단계 더 위로 끌어올린 곡은 마음이 고와야지란 로커빌리 스타일의 곡이다. 다분히 엘비스의 창법을 모사한 꺾임과 바이브레이션은 트로트뿐 아니라 빠른 노래에도 잘 들어맞았고 이인범으로 전수받은 허리춤은 다리로 미국을 제패했던 엘비스와 비슷하게 전국의 소녀 팬들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 그리고 트로트로 선회하는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며 역사상 없었던 장르의 왕좌를 꿰찬다. 당대의 독보적인 가수의 위치로 격상되는 순간이다. 남진 가수로의 성공과 잘생긴 외모, 그리고 영화를 전공한 이력으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영화를 찍게 되었으며 순식간에 주연급이 되어 당대의 미녀배우들과 연기를 함은 물론 스캔들을 뿌리기 시작한다. 

그 절정의 순간, 남진은 군대를 택한다. 당시에는 군대를 다녀와야 해외활동이 자유로웠던 시절이라 지금과는 달랐다. 남진 인기의 하락을 염려하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군대 행을 택했으며 그것도 어려서부터 동경했던 해병대의 모습으로 월남전까지 수행하는, 현대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면모를 보인다. 이것은 가수로서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를 찍고 최고의 인기 중에 군대를 다녀왔던 엘비스의 행보와 또 한 번 겹쳐지는 부분이다. 이런 탓인지 그의 인기는 군대에 가서도 식지 않아 69년에는 장병임에도 불구하고 TBC에서 최고남자가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으며 심지어 잠깐 휴가 나와 발표했던 사랑이 스쳐간 상처1위에 오르며 나훈아와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하지만 군에서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결코 쉽지 않은 장병 생활을 했다. 

인기의 하락에 대한 불안은 예상과 달리 더욱 더 폭발적인 사랑으로 바뀌어 다가왔다. 1971남진은 당시 최고의 쇼 오락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TBC <쇼쇼쇼>에 출연해 엘비스의 영화 <G.I. blues>에 쓰였던 동명의 주제곡을 부르며 컴백한다. 그리고 국내 가수로서는 최초로 만원의 관중들이 모인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리사이틀을 펼친다. 여전히 뉴스메이커로서의 위상을 자랑하며 컴백 4개월 만에 무대예술상 그랑프리 대상, TBC 남자 가수상, MBC 최고 가수왕에 오른다. 남진 제대할 당시에는 또 한명의 걸출한 신인 나훈아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가 제대하자 언론과 여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되는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라이벌로 몰고 갔다. 이후 이들은 한국 지성계의 대표적인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도 대결 구도가 등장할 정도로 큰 화제를 모으며 1990년대 말 불어 닥친 아이돌 그룹의 풍선개수 놀이처럼 객석을 양분하며 천하를 호령한다. 하지만 초기에는 남진이 내리 3연속 가수왕에 오르면서 사실상 나훈아를 압도했다. 그 후 라이벌 관계는 지구와 오아시스 간의 전쟁으로 치달았고 그 최고점은 남진의 팬을 자처했던 김웅철이란 사람이 사이다 병을 휘둘러 나훈아를 폭행한 사건이다. 남진은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아 가수 분과위에서 제명 위기를 겪기도 하는데 김웅철은 이후에 거꾸로 남진을 피습하며 1980년에는 목포에 있는 집까지 불을 질러 최악의 팬으로 남는다. 

1975년까지 10대 가수상에 오르며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 때의 작품은 대부분 박춘석 정두수의 합작품이다. 젊은 초원, 그대여 변치마오 등을 히트시킨 박춘석은 1974년 박춘석 프로덕션을 출범시키고 남진이미자를 대도 레코드에 전속시켰다. 그에 힘입어 남진은 레코드가 팔리는 숫자대로 개런티를 받는 국내 최초의 인세 가수가 되었으며 마음이 고와야지남진하면 떠오르는 희대의 히트곡 님과 함께를 이 때 히트시킨다. 

1970년대 중반이후에도 미워도 다시 한번 등을 히트시켰지만 이후에는 가수로서의 인기가 사라졌다고 볼 순 없지만 조용필의 등장과 함께 트로트 음악이 전반적인 약세로 돌아서는 분위기에서 노래보다는 스캔들로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특히 가수 윤복희와의 스캔들, 결별, 결혼, 이혼 오아시스로의 이행, 술 취한 팬과 객석다툼 등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이후 그는 미국행, 재혼, 미국에서 식품점 경영 등으로 TV에서 사라졌다가 1982 빈잔을 들고 컴백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뒤였고 광주민주화투쟁으로 몸살을 알았던 탓인지 방송국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연예인들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방송사와의 여러 번에 걸친 방송 불발로 1984년 본의 아니게 낙향을 하게 되고 고향에서 나이트클럽을 개업하며 사업으로 방향 전환을 꾀했다. 

하지만 기존의 터를 닦아 둔 타 클럽 운영자들이 그를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사업가로 경영을 시작하고 1986년 신곡을 발표하며 이듬해부터 다시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을 때 19891120대 청년 3명에게 긴 칼로 허벅지 하단부를 관통 당하는 피습을 당한다. 그토록 사랑하던 고향 사람들에게 당했기에 마음의 상처가 더 컸다. 그는 당시의 심정에 대해 TV 토크쇼에 나와 처음으로 고향이 미웠다고 밝힌바 있다. 지금도 남진은 이 사고로 불편을 겪고 있다.

1990년대 초반, 10여 년 전 발표한 빈잔이 새롭게 조명 받았고 1991년에는 가수 분과위원회 14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4년에는 힐튼호텔에서 30년 결산 기념콘서트를 열었으며 2000년에는 한국연예협회 제7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KBS 가요대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영화배우 안성기와 함께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대한가수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골든디스크 공로상을 수상했다. 19987조선일보가 선정한 건국이후 가수 베스트 50에서 10위를 기록했다.  

남진은 전성기까지만 해도 트로트가수로만 분류되기는 어려운 장르의 노래들을 소화했다. 하지만 국내에 돌아와 재기에 돌입한 이후로는 트로트에만 매진하는 느낌이다. 2009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을 기리는 노래 님 오신 목포항, 행사계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윤정당신이 좋아 등도 트로트 팬층에게만 기대고 있는 느낌이다. 2011MBC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임재범빈잔, 김범수님과 함께를 리메이크함으로써 재평가되었고 MBC 추석 편성인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출연해 1위를 차지했다. 

20111201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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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지운 Rainy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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