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이리) 출신인 최진희는 원래는 성악가나 지휘자를 꿈꾸던 소녀였다. 이미자 노래를 잘 불렀던 친구와 함께 또 다른 방향으로 음악에 대한 열망을 키우던 최진희는 그 친구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을 빌려 지금껏 꿈꾸어 오던 방향과는 다른 쪽의 문을 두들긴다. 서울까지의 차비가 걱정스러웠지만 모든 경비를 대준 친구 덕에 ‘친구 따라 갔다가 자기만 붙었다’는 숱한 전설 속의 인기인들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그리고 별다른 준비 없이 데뷔전을 치른다. 하지만 작곡가 김학송의 지원 아래 발표한 소원은 대중 음악계의 높은 벽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기념 앨범 한 장 내고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 수많은 도전자들과 달리 당시 최진희가 가졌던 의지는 남달랐던 것 같다. 밤무대를 통해 대중음악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호텔을 중심으로 돌아다니며 양떼들, 조커스 등의 그룹과 활동했다. 지금도 가끔씩 그녀의 목소리에서 들을 수 있는 샤우트 창법은 이 시절 단련된 것이다. 무려 8년여에 걸친 기나긴 시간 속에서 무명이라는 설움은 항상 지속적인 가족들의 심한 반대와 함께 찾아오곤 했다.
1982년 조커스에서 노래를 부르던 최진희를 발탁한 것은 작곡가 김희갑이다. 쓸 만한 여성보컬을 찾고 있던 김희갑은 솟구치는 탄력이 매력인 그녀의 퍼포먼스를 보고 오디션을 생략한다. 그리고 1년 후 드라마 <청춘 행진곡>의 주제가인 그대는 나의 인생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렇게 큰 기대도 하지 않았고 최진희를 원톱으로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듀엣으로 밀고 나갔지만 결과적으로 최진희는 단번에 가수의 이름이 기억되는 세상으로 튀어 나왔다. 당시 주제가는 지금처럼 전략적으로 홍보하던 시대가 아니어서 반응이 크지 않았으면 묻혀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쇄도하는 음반 구입 문의 전화는 음반 제작자를 움직였다. 그대는 나의 인생은 베이스 주자였던 허영래와 같이 부른 것으로, 한울타리라는 이름이 급조되었다(강변가요제에서 푸른 여름에는으로 금상을 수상한 한울타리와는 상관이 없다). 당시 드라마 방송 때 곡의 가사를 노래방의 자막처럼 처리 할 정도로 이 곡의 반응은 폭발적 이였고 드라마와 노래 모두 동반상승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렇게 되자 갑자기 밴드도 덩달아 바빠져 지방을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할 정도의 스케줄이 생겼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익숙치않았던 멤버들은 지속되는 공연에 지쳤고 최진희의 개인적인 인기에 힘입은 바 크니 그녀를 솔로로 내보내는 것에 대한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쫓는 모양새가 되지 않도록 김희갑은 최진희의 솔로 앨범을 기획했다.
김희갑이 만든 곡들로 채워진 최진희의 솔로 앨범은 1983년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였고 지금까지 발표한 그녀의 모든 앨범을 통틀어 가장 완성도가 뛰어난 앨범이다. 사랑의 미로는 노래로 성공할 수 있는 가수의 인기도 면에서 최고치로 뻗어나갔으며 1년 동안 차트에 머물렀다(심지어 북한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뒤이어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역시 정상권에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드라마 주제곡으로 사용된 물보라는 음반의 구매욕을 자극했다. 이렇게 시원하게 발라드를 불러주는 가수는 당시에 흔치 않았다.
최진희는 이 앨범으로 1984년 한국가요 작가협회 가수상, 1985년 백상 예술대상, KBS 10대 가수상 등을 수상했으며 1986년 MBC 국제 가요제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도로 금상을, 1987년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ABU 가요제에서 동그라미 위의 연인들로 역시 금상을 받으며 대외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카페에서, 외로운 여자, 가버린 당신, 꼬마 인형, 여심, 사랑의 열쇠, 슬픈 고백, 윤수일과의 듀엣 곡 찻잔의 이별 등의 팝과 트로트의 경계선에 있는 곡들로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빠지지 않고 꾸준히 연말 시상식에서 이름을 내비침으로써 기나긴 인기를 과시한다. 그리고 1989년 일본 진출을 위해 미련 때문에라는 곡으로 트로트 장르에 도전했던 기억을 발판삼아 1998년부터는 완전히 트로트로 전향해서 첫사랑을 발표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장르가 가진 인기의 편중성 때문에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진 느낌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여의면서 한 동안 노래를 부르지 못하기도 했다.
가수 활동 이외에 여러 봉사활동에 참여하며 1999년에는 연예인 선행활동 국무총리상을, 2004년에는 같은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또한 평소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장점을 살려 백운호수에 ‘사랑의 미로’라는 한식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김치사업에도 뛰어들어 사업가로서의 면모도 과시하고 있다.
20111230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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