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습관이다. 당신이 듣는 음악 속에 당신의 음악에 대한 역사가 있고 스펙트럼이 있다. 당신이 록 음악만 주구장창 들었다면 트로트나 클래식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클래식음악만 들었다면 대중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록 음악 중에서 강성(요즘 흔히 국내 필자들에 의해 헤비니스라고 라는)의 음악만을 들었다면 팝 메탈 같은 음악은 성에 차지 않을 것이고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고전음악만 들었다면 고전음악을 들었던 그 시간만큼 현대음악을 듣고 있기 힘들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조건문의 역도 성립한다.
특정 마니아층을 제외하고는 위의 경우처럼 한 장르의 음악만을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가 선호하는 장르가 있고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이 있다. 그러니 한 번 잘 생각해보고 비율을 나눠보라. 당신은 특정 장르의 음악을 다른 장르나 스타일에 비해 50% 이상 듣고 있을 것이다. 장르나 스타일이란 명칭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성향이라고 해도 좋다. 당신의 성향을 알 수 있다면 음악을 찾기도 쉬워진다. 이 성향 속에서는 ‘심리적’인 것도 포함한다. 만약 50% 이상이라면, 즉 음악을 다양하게 듣지 않는다면, 자기가 듣는 음악에 대한 애착이 강하며 다른 장르의 음악을 배척하기 쉽다. 그것은 서양의 음악 역사가 말해준다. 아니, 그렇게 역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음악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특정 음악스타일을 가지고 싸워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고 좋아하는 가수의 우위를 따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특정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 이외의 장르에 대해 묻는 것은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는 그것을 시도한다. 한 무대에서 다양한 가수(아직까지는 그렇다고 보기 힘들지만) 7명을 모아놓고 누구의 음악이 더 좋은가를 따진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가? 3월 27일 경연에서 나도 맘속으로 김범수를 1위로 꼽았지만 2위는 정엽이였고 3위는 이소라 4위는 김건모였다. 하지만 9%의 지지를 얻은 정엽이 탈락하고 말았다. 할 수없이 이 프로그램을 계속 보고자 한다면 취향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내가 그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 혹은 나와 경험이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시보기를 해도 박정현과 윤도현과 백지영의 음악은 먼저 선택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너무 많이 들어서 이 음악들 자체가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운명처럼 이 음악들은 듣기 ‘좋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상실해버렸다.
이것이 모든 음악시상식에서 장르를 나눠 시상하는 이유이다. 시상식에서 누가 상 받을지 기대되지 않는가?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가수다>는 재미를 준다.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경쟁의 다른 말은 노력이다. 그러므로 '수에 대한 모독'라는 말에, 그들은 이미 검증받았으므로 경쟁이 불필요하다는 말에, 검투사 같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위프로그램(빌보드까지 포함해서)에 가슴 졸이던 과거의 모든 가수들과 지금의 가수들은 뭐란 말인가? 그래미상은 무엇 하러 이미 주었던 음악인들에게 상을 또 주는가? (영화이야기이긴 하지만) 세계의 유수한 감독들은 왜 그토록 대놓고 경쟁하는 칸느에, 혹은 아카데미에 목을 매는가?
우리는 이 프로그램에 그토록 전투적인 자세로 대응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앨범, 새로운 작품을 대중에게 평가받듯이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7명의 가수들도 그렇게 평가하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을 가질 수 없으므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와 스타일에 공평하게 점수를 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개인의 경험을 가진 주관적인 사람들이다. 객관을 기대하지 말자. 무엇보다도 현장성(그 날의 컨디션, 편곡, 연주, 객석의 분위기, 그 날 평가단의 컨디션 등)에서 점수가 갈린다(윤도현이 1위할 때를 보라. 감동은 절대 가창력만으로 오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호를 무시할 수 없다. 특정 가수를 좋아하면 그 가수의 무대는 어떻게 불러도 좋아 보인다. 거기다 내가 싫어하는 가수는 아무리 잘 불러도 절대 표를 주기가 싫다. 그리고 그 티를 내기 싫으니 우리는 자신을 객관성이라는 허구로 포장시키고 합리화시킨다.
따라서 TV를 보는 사람들은 경쟁을 즐기고 담담히 결과를 받아들이면 된다. 결과가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청중평가단을 욕할 필요도 없다. 그 시간 그 장소에 당신이 있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무대를 알 수 없다. 당신은 집에서 자신의 분위기와 자신의 음향으로 듣고 판단할 따름인 것이다. 또한 탈락을 했다고 해서 아무도 그 가수에게 침을 뱉지 않는다. 오히려 7인의 명단에 올랐다는 것은 그래미 시상식이나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탈락’이라는 시스템이 가수들을 더 노력하게 만들고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재미있게 만든다. 장기적으로도 우리 음악계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20110406 / 20111210 한겨레 훅 /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마주침 > 한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세시대를 사는 우리의 자세 (0) | 2015.09.05 |
---|---|
왜 에릭 클랩튼의 별명은 슬로우핸드일까? (0) | 2014.06.29 |
외국어로 된 음악용어 (0) | 2012.12.28 |
연말 가요시상식에 대한 단상 - 현지운 / 2010 (0) | 2012.02.17 |
5초 가창력 논란에 대한 소고 (0) | 2011.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