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탄생한 트로트란 장르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3번에 걸쳐 융기한다. 그 첫 번째는 당시 주류였던 창가, 신민요를 제치고 서민의 품으로 들어온 일제강점기 후반의 일이며 두 번째는 이미자를 필두로 남진과 나훈아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60년대,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주현미와 소위 트로트 4인방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서구대중음악보다 먼저 입장해 장구한 시간을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트로트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얻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주도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주장 때문이다. 거기에 1980년대 후반의 인기는 관과 방송사가 연합한 결과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 거세게 일어난 트로트의 봉기는 정부의 정치적 의도 속에 피워 낸 정정당당하지 못한 게임 이였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걸맞게 KBS는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해 다른 여타의 장르를 배제하고 대대적인 ‘트로트 밀어주기’를 암암리에 시도했다. 이런 공영방송 주도의 인위적인 시장 만들기는 새로운 유형의 감각이나 빠른 곡보다는 발라드나 트로트에 입각한 노력형 가수를 밀어주는 KBS의 성향과 합쳐져 기나긴 무명끝에 서광을 껴안은 현철에게 1989년과 1990년 거푸 대상을 하사하면서 그를 최대 수혜자로 점찍는다. 트로트 보호는 팝 발라드의 대세와 언더그라운드의 폭발적인 약진 속에서 일시적으로 트로트세대의 연합을 가져왔다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폭발한 젊은 세대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겨버려 장기적인 트로트 살리기보다는 단기적인 구명운동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현철은 박자와 상관없이 울고 넘는 박달재를 늘 흥얼거리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노래와 가까이 있었다. 하지만 가수보다는 은행원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때문에 경영학과에 진학해야만 했다. 대학 시절 친구 아버지의 쇼단에 서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입문한 그는 많은 경연대회에 출전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보이스를 청중들에게 각인시킨다. 이런 열망은 1969년 데뷔곡 무정한 당신으로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데뷔는 데뷔일 뿐 당장 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데뷔만을 꿈꾸던 지망생들은 이제 무명과 유명 사이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 역시 이후 18여 년간을 번번한 히트곡 없이 무명의 긴 시간 속에서 방황한다. 그 동안 그는 결혼을 했으며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 음악학원을 경영하기도 해보고 건축현장에서 벽돌을 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버티며 끊임없이 셋방살이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래를 놓지는 않았다. 1974년에는 현철과 벌떼들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친구 집 아들 같이 부르기 쉬운 현철이란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협동정신이 강하고 그룹의 단결된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벌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7인조로 출발했던 이 그룹은 외국의 팝송을 주로 카피했으며 번안 곡들을 묶어 앨범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멤버들은 하나 둘씩 빠져나갔고 후에 트로트곡을 전문적으로 작곡하며 명성을 떨친 박성훈과 그, 둘만이 남게 되었다. 둘은 다 함께 춤을이란 곡을 다운타운가에 알리면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성훈마저 활동무대를 넓히기 위해 서울로 떠나버리고 부산에 혼자 남은 그는 1980년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그간 고생을 한 아내를 위해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이란 곡을 만든다.
1982년 발표한 현철과 벌떼들의 앨범은 가수 현철을 다시 태어나게 한 음반이다. 그는 현철과 벌떼들이란 이름을 유지하며 한 명의 여성을 영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듀오로 만든 이 음반의 수록곡인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과 사랑은 나비 인가봐는 입소문만으로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 그러자 그도 가족을 부산에 두고 서울로 상경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부산에 있을 때보다도 못한 대접에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볕들 날을 희망하던 그는 1985년에 이르러 위 두 곡이 히트곡 대열에 합류하면서 오랜 무명의 겉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1986년 아프리카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에 파견된 해외 근로자들을 위해 방송을 했던 <KBS 가요무대>는 그를 꿈에 그리던 스타덤으로 안착시킨다. 방송을 탄 사랑은 나비 인가봐는 폭발적인 리퀘스트를 받았으며 그는 곧이어 항구의 부르스, 내 마음 별과같이를 내놓는다. 내 마음 별과같이를 발표하면서부터는 벌떼들이란 이름을 떼어버리고 솔로 비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8년에 발표한 봉선화 연정은 1989년의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며 김흥국의 호랑나비와 함께 차트의 패자가 되어 자신의 인기전선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KBS의 대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맛본다. 그의 긴 무명시절은 단번에 치솟은 최고 가수의 영예로 인해 성공한 가수들을 장식하는 액세서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어 박성훈이 만든 싫다 싫어로 1990년의 KBS 대상까지 거머쥐며 2연패를 달성하며 최전성기를 보낸다. 그리고 비록 태진아나 송대관이 간간이 터트린 대형 히트곡처럼 차트를 장악할 만큼의 카리스마는 보여주지 못하지만 사랑의 이름표, 청춘을 돌려다오, 현철과 춤을, 아미새 등의 인기곡을 보유하며 현철이란 이름에 붙은 프리미엄으로 트로트 4인방의 위치를 단단하게 지켜나간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여전히 다양한 공연과 해외활동으로 받은 수많은 상과 공로상으로 프로필을 채워나가고 있다.
노래 부를 때 높은 ‘미’에서 꼭 꺾어진다고 말하는 그는 민요가락 중 ‘닐리리아 닐리리아 니나노∼’의 ‘노’의 올라가는 창법을 응용해 창법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의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주현미의 목소리와 더불어 요나누끼 음계를 넘어서는 트로트의 전형적인 패턴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으며 나훈아, 이미자 등의 발성과는 다른 1980 ~ 90년대의 트로트 창법을 결정지었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문법은 이후 트로트는 꺾지 않으면 왠지 트로트 같지가 않게 되었으며 트로트 음계를 차용한 음악이 아니더라도 꺾으면 왠지 트로트 같이 들리게 만드는 마법의 구두와 같은 것이 되었다.
20100618 / 20120103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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