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요/ 우리의 사랑을/ 잊지 말아요/ 우리의 기억들을/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한창 성장기에 있던 약관의 한 뮤지션은 이와 같이 이별의 가사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모든 음악인의 죽음은, 팬들에게 공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기 마련이지만 나이 어린 스타일수록 그 황당함은 배가된다. 우리 음악계의 지각변동을 바로 목전에 둔 1990년,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장덕은 '80년대 추상적이고 모호했던 가사를 가지고 있던 음악들의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당시 10대들이 품고 있던 생각을 표출할 수 있었던, 신세대적 감각이 출중했던 프로듀서 중의 한 명 이였다. 그녀의 음악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한 결 같이 어둡게 이별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지만 그녀의 활약은 우리의 뇌에서 쉽게 잊혀 지지 않을 만큼 밝고 인상적 이였다. 어쩌면 '80년대 음악의 끝은 고 유재하의 죽음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 아니라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던 바로 그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김완선, 이선희 이상으로 롱런하며 최초의 여성 프로듀서로, 지금 박진영의 위치에 서 있었을 지도 모를 그녀를 생각하면 밀려드는 애석함은 원혼이 되어 팬들의 가슴에 박혀 있다.
시립 교향악단에서 활약했으며 안익태가 인정했다는 첼리스트 아버지와 서양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녀는 뿐 철학이라는 동양 사상을 연구하며 수시로 집을 비우는 아버지로 인해 텅 빈집에서 잠드는 날이 많았으며 오빠가 음악활동으로 집을 나간 이후에는 몸서리쳐지는 외로움에 가출을 시도하며 급기야 유서를 써놓고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숙제를 빌미로 처음 작곡을 접한 그녀에게 그나마 음악은 세상의 유일한 친구가 돼주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배운 기타로 줄곧 오선지와 씨름하며 노래를 곧 잘 불러 <누가 누가 잘하나> 등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으며 중학교 들어서는, 곡을 발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중 2때 만든 곡인 소녀와 가로등은 장덕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7년 <제1회 MBC 국제가요제>에 입선했다. 장덕은 최연소의 나이로 악단을 지휘했고 노래는 진미령이 불렀다. 이 대회와의 인연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78년 장현의 더욱 큰 사랑, '79년 박경희의 사랑이였네, '80년 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등이 모두 입상하며 나이 어린 소녀의 음악적 진가를 높여주었다.
자살소동으로 놀랜 어머니의 주선으로 오빠와 함께 드래곤 랫츠(Dragon Rats)라는 이름으로 미 8군 무대에 오른 그녀는 라틴 음악과 팝을 통기타로 연주하며 미군 병사들에게 한국판 카펜터즈(Carpenters)로 불리며 인기를 누렸다. 그러던 중 영화 <마음의 행로>에 출연하며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었고 곧 현이와 덕이라는 듀엣으로 음악계에 신고식을 치룬다. 순진한 아이, 꼬마 인형 등으로 인기를 모은 그녀는 안양예고에 진학했으며 주연을 맡은 <내 마음 나도 몰라>를 비롯해 <우리들의 선생님>, <선생님 안녕>, <우리들의 고교시대> 등 10여 편의 하이틴 영화에 출연하면서 아역 스타로도 이름을 날린다. 또한 <푸른 시절>에서는 음악으로 참여한다.
고교 졸업 후 장덕은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테네시 주립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며 계속 음악과 관련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결혼 생활, 향수병 등으로 미칠 듯 한 외로움이 다시 찾아오자 서울로 도망쳤고 이번에는 솔로로 연예계를 찾는다. 그러나 날 찾지 말아요가 머리 곡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앨범은 기대만큼 높은 팬들의 사랑을 가져다주진 않았다. 음악계는 3년 전 활동했던 때와 판이하게 달라졌고 당황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다시 우울한 분위기와 시간을 보냈다. 이 때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의 음악을 맡기도 했지만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했다.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한 오빠는 다시 자신과 활동 할 것을 제안했고 현이와 덕이는 그렇게 재구성되었다. 다행히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날 찾지 말아요 등이 다운타운과 라디오를 중심으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녀는 다시 한 번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1986년 발표한 앨범은 그녀가 누린 인기의 총합 이였다. TV와 신문을 온통 그녀의 이름으로 도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곡은 최대의 히트곡 님 떠난 후였다. 이 곡은 <가요 톱 텐>에서 연속 5주 1위를 하며 그 해 최고의 곡이 되었으며 이 곡과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어려워란 수준작이 들어 있는 앨범은 그 해 최고의 앨범 대열에 끼였다. 언론과 매스컴의 대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장덕은 이후 정수라, 이선희 등과 바지 삼총사로 불리며 이별인줄 알았어요, 김파 작곡의 귀여운 댄스 넘버 얘얘, 내 말 좀 들어요 등을 히트시키며 가수로서 확고한 터전을 잡았다. 거기에 이은하에게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김진아에게 묻지 말아요 등을 주며 작곡가로서 동료가수들에게도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되자 장현은 그 동안 출연했던 밤무대를 모두 정리하고 매니지먼트에 힘을 쏟아 장덕을 비롯해 박혜성, 훈이와 슈퍼스타 등의 가수들을 영입해 코아기획이라는 음반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렸다. 이 대열에 합류한 장덕은 어느 때보다 더 앨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1990년 KBS신년 특집극 <구리반지>에 출연하며 과거 연기했던 경험도 살렸다.
하지만 하늘은 약 7개월의 시간을 두고 장덕과 오빠를 차례대로 불러갔다. 설암을 앓으며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던 고 장현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열창해 주위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그녀의 사망원인은 치사량의 수면제로 인한 약물과다복용으로 밝혀졌다. 평소에도 불면증으로 고생했던 그녀의 잠자리를 보살펴주던 약이 그녀를 영원히 잠들게 했던 것이다. 우연히도 2월 4일은 카렌 카펜터즈(karen Carpenter)의 기일이기도 하다.
장덕의 사후에는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되었으며 여기에는 위일청, 이선희, 임지훈, 김범룡, 지예, 박혜성, 임종환, 전영록, 최성수, 진미령, 양하영 등이 참여했다. 어머니 이숙희씨는 그녀의 삶에 대한 보고서 성격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란 제목의 책을 발표해 외롭고 쓸쓸했던 그녀의 유년기를 공개했다.
200212 / 웹진 이즘 /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 1 ] 날 찾지 말아요, 서라벌 1983
[ 2 ] 사슴여인, 서라벌 1984
[ 3 ] 님 떠난 후, 아세아 1986
[ 4 ] 얘얘, 태광 1988
[ 5 ] 그녀의 모든 것, 서울 1988
[ 6 ]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현대음향 1989
[ 7 ]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추모앨범), 뉴서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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