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1일 새벽 강변북로를 달리던 포니2가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충돌했다. 거기에 타고 있던 꿈 많은 미완의 25살짜리 음악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즉사했다. 그렇게 유재하라는 천재의 전설은 시작된다(유독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음주운전 차를 타고 가다 변을 당했다. 이후 그 친구의 부모는 4천4백60만원이라는 배상 판결을 받는다). 유재하 음악 장학회 이사를 맡고 있는 바로 위의 형 유건하는 유재하의 마지막 말을 기억한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해치우고 올게~."
유재하는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유일청 - 1989년 작고)와 어머니(황영) 사이에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그는 소위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전기 기타로 자신의 싹트는 창작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 이런 후천적인 환경 덕택에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형은 “초등학교 때 아코디언과 첼로를 연주했고 5학년 때부터 기타를 붙잡고 살더니 중학생이 되어서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쳤어요”라고 말했다. 중학시절엔 브레드(Bread), 퀸(Queen), 비틀즈(Beatles), 피터 프램프턴(Peter Frampton) 등 팝이라 부르는 서양 대중음악 많이 들으며 대중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나갔고 그렇게 음악에 대한 애정을 쌓아가던 중(프레쉬(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했다) 클래식이라 부르는 서양 고전음악으로 진로를 잡는다.
대중음악에 대한 교육적인 인식이 전무하던 시절 이였기에 진학을 위해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사실상 그것이 전부였다. 그 때문에 한양대 음대 작곡과(이 당시의 동창은 작곡가 김형석과 MBC <수요 예술 무대>의 PD였던 한봉근이 있다)에 진학하긴 했지만 4학년 때인 1982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 그룹에 키보디스트로 몸을 담으면서 대중음악에 대한 열정을 꺾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시 학계에서는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엄격히 구분하고 고전음악을 전공했을 경우에 대중음악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어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 작은 일탈은 조그만 씨앗을 만들기도 한다. 조용필의 7집에 그의 대표작 사랑하기 때문에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 유재하는 클래식음악으로 진로를 잡지 않고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에 들어간다. 그 때가 1982년이었다. 김종진은 이 당시 유재하에 대해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무대에서, (김)현식이형이 ‘키보드의 유재하입니다!’ 하고 소개했더니 키보드를 밟고 올라가서 사람들한테 막 손을 흔드는 거예요. 그리고서는 날 공연 끝나고는 신나서 ‘야, 나 해냈어! 내가 원하는 게 이거야!’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클래식과 달리 즉흥적으로 관객과 호흡하는 대중음악의 현장성에 경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재하는 6개월간 팀원으로 활동하면서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을 만들어오라고 하자 자신이 만든 모든 곡을 갖다 주었다. 하지만 김현식은 그 중에서 가리워진 길만 선택한다. 김현식은 멤버들이 만든 곡들 중 공평하게 한 곡씩만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재하는 자신의 모든 곡을 선택하지 않아 섭섭해 했다.
그리고 그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팀을 나온다. 그리고 그냥 자기가 직접 해결하기 위해 솔로 앨범을 구상한다. 유재하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이자 후에 매니지먼트를 맡는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이 생각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작사, 작곡은 물론 편곡에 대한 완벽한 밑그림을 이미 제시해 놓았기에 작업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800만원 상당의 자비로 앨범을 내는 거라 누구의 간섭도 필요치 않았다. 친형이 무슨 장르냐고 묻자 유재하는 "음악에 장르가 어딨어. 뭐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크로스오버랄까. 나 같은 장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1987년 3월 봄의 새싹들과 함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유재하는 노래 실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방송사의 오디션(일종의 가수에 대한 심의 같은 것이다)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앨범 발표 후에 대중적인 반응이 없자 자신감을 잃고 지인들에게 자신의 음반을 들려주고 의견을 묻고는 초조해한다. "아, 그래요. 알아요, 노래 못하죠..."라며. 유재하는 형에게 “내가 송창식처럼 노래를 잘 부르지도 않고 대중성을 고려하긴 했는데 어렵게 들려서 반응이 없나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이 예선탈락을 선사하며 그에게 비운의 조짐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봄부터 이어진 길게만 느껴지던 무명의 시간은 지난날이 라디오 전파를 서서히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이전 가수들과 달리 힘을 빼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도 덩달아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름은 가을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막 팬들의 사랑을 느낄 즈음 그의 삶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지되었다. 그렇게 그는 우리 곁을 훌쩍 떠났다. 앞으로 발표할 수많은 걸작들을 음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물론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파가 크긴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앨범 한 장으로 전설이 된 거장의 역사다. 평론계에서도, 대중적으로도, 실제 뮤지션들에게 끼치는 그 영향력에 있어서도 국내 대중음악 역사에서 최고의 정점을 찍는다.
1년 뒤의 추모공연은 조동진, 이광조, 김수철과 같은 당대의 음악인들이 함께 했으며 그 수익금과 더불어 발족된 유재하 음악 장학회는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조규찬, 유희열, 이규호, 박인영, 정혜선, 스윗 소로우, 루시드 폴 등의 셀수 없이 많은 기라성 같은 신예들을 배출했다. 그의 사후 10주년에는 김현철이 주축이 되어 신해철, 이적, 이소라 등 100여 명의 음악인들이 모여 추모앨범을 만들었고 기념비를 추진했다.
뽕끼를 없애고 담백하게 감정을 담아내는 그의 발라드의 문법은 이후 모든 발라드 가수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1990년대 댄스 음악의 출현을 뚫고서 우리 음악계를 풍미했다. 우리 음악계의 발라드는 유재하의 음악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건 아직까지도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아티스트들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아직도 끊이지 않고 그런 꿈나무들이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근거는 부족하지 않다.
20191101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커피 한 잔으로
'대한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드 포(Add 4) 1962 ~ 1966 (0) | 2020.10.07 |
---|---|
장연주 19781215 (0) | 2020.08.24 |
채규엽 1906 ~1949 (0) | 2019.04.14 |
이상준(李尙俊) 1884 ~ 1948 (0) | 2019.02.10 |
김인식 18850919 ~ 19620217 (4) | 2019.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