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엽(蔡奎燁, 하세가와 이치로, 長谷川一郎 하세가와 이치로, 1906년 ~ 1949)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전까지 활동했던 가수로, 국내 최초의 직업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1920년대 중반에 일본 동경 중앙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그는 1928년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졌고 1930년에는 근화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성악을 공부한 경력 때문에 일본 콜럼비아의 경성지부 설립 축하연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가수로 데뷔하였다. 봄노래 부르자, 유랑인의 노래,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더냐, 봉자의 죽음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고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설문조사인 매일신보 잡지 삼천리 구독자 투표에서 남자가수 1위를 차지했다. 강석연(姜石燕)과 부른 봄타령은 불러 우리나라 최초의 혼성 듀엣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1937년 발표한 명사십리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백년설, 남인수 등의 인기에 밀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하세가와란 이름으로 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채규엽은 당시 사기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일본에서 발매한 연심(戀心)이란 곡이 24만장 팔려 자신의 최고 기록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 인기로 인한 경제적 풍요를 잊지 못했는지, 이후 일본군 장교가 되었고 일본인과 결혼을 해 큰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국내 신문들은 내선일체(内鮮一体,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의 좋은 본보기로 기사를 실었고 채규업은 한 술 더 떠 일본 제국주의 단체인 대정익찬회에 가입해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할 비행기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후에 채규엽은 반민특위 등 친일파에 대한 청산작업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자 충남논산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피해 살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창경원 최초 야외가설무대 기념 공연으로 복귀했다. 워낙 기라성같은 친일파들이 많아 그에게까지 체포영장이 갈 여력도, 관심도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채규엽은 최대 고민은 대머리였던 것 같다. 황문평의 <가요60년사>를 보면 그는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머리에 숯검정을 칠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래만 잘 부르면 됐지 그럴 필요가 있냐는 질문에는 “몇 해라도 더 해먹기 위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채규엽은 음악계로 돌아온 이후에 지방순회공연 단체를 인솔하고 다녔다. 하지만 초반의 재미에 비해 연이은 적자흥행으로 부도수표를 남발하자 사기죄로 구속되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의하면 100만원 정도를 들고 도망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러자 후배들은 그의 석방을돕기 위해 모금 공연을 갖는다. 출연진 전원이 무료로 출연해 훈훈한 인간애를 발휘한 <동방의 여명 - 스카라 극장> 공연은 유래없는 역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며 채규엽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되지도 않는 사업을 계속 했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실패하고 빚에 쪼들리자 이번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갔다고도 할 수 있고 북한에는 친구인 작곡가 이면상과 가수 이규남이 문예총에서 근무하고 있어 그들을 믿고 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모든 친일파들을 숙청하는 분위기였기에 그의 이력으로 생존은 불가능했다. 한국전쟁 1.4 후퇴 때 남쪽으로 넘어온 연예인들의 말해 의하면 북으로 넘어가자마자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갔다고 하고 1997년에 평양에서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라는 책에서는 넘어간 그해 1949년 고향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90414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때 돌아 꽃은 피고
새 우는 이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 다 모여라 춤을 추며 봄노래 부르자
오너라 동무야 소리를 높이 봄노래 부르면서
이 강산 잔디밭 향기 위에 민들레 꽃 따면서
동무들아 다같이 이 봄을 찬미하며 이 봄이 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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