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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김인식 18850919 ~ 19620217

by Rainysunshine 2019.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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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金仁湜, 18850919 ~ 19620217)은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였고 최초의 서양음악 형식의 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스타일은 선교사들로부터 배우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유교적 사고를 지닌 아버지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김인식은 평양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기독교 예배당에 다니면서 창가(唱歌)류의 음악을 처음 접했고 평양숭실중학교 재학시절 성악, 오르간, 바이올린 등을 배우며 음악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 실력이 뛰어난 조교를 뽑아 월급을 주면서 아래 학년을 가르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김인식도 그런 조교 중 한 명으로 뽑혀 오르간을 치면서 아래 학년들의 음악 시간을 맡아 가르쳤다. 그의 일화 중에 선교사가 가지고 있던 풍금이 너무나 가지고 싶어, 동급생 4명이 돈을 모아 산 이야기가 전해진다. 돈은 모아서 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3명이 잘 사용하지 않자 결국 김인식이 독차지하게 되었다. 김인식은 기숙사에 기거하며 틈나는대로 풍금을 두들기다 쫓겨날뻔 하기도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의 열정을 도저히 참지 못한 주위의 학생들이 풍금소리에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는 민원을 넣은 것이다. 그가 얼마나 당시에 음악에 미쳐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김인식이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첫 번째 순간은 첫 창작곡이다. 1905년 평양 서문 밖에서 소학교 연합운동회가 열렸을 때 김인식이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든 것이다. 학도가(學徒歌)라 불리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에서 창작 음악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인 1900년, 일본의 오오노 우메와카(多 梅稚)가 지은 철도창가(鐵道唱歌)의 멜로디를 가져온 학도가와는 다른 곡) 김인식은 이 외에도 표모가(漂母歌), 애국가, 전진가, 국기가 등의 곡을 남겨 서양 음악 형식의 창작곡에 대한 시작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졸업 후에는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주변의 권유로 횡성기독청년회에서 개설한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의 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교육기관 조선정악전습소(조양구락부)에서 서양악부 선생으로 재직하며 홍난파(洪蘭坡, 18980410 ~ 19410830)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 일도 그의 명성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

 

1912년 현존하는 창가집 가운데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교과적용보통창가집>을 출간했고 1914<조선구락영산회상>을 출판해 영산회상, 여민락 등 전통 음악을 서양 악보로 채보하는 최초의 작업을 했다. 이 때문에 전통음악과 서양 음악을 두루 섭렵하고 우리 심성에 맞는 음악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 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서울 종교교회에서 한국 최초로 합창대를 조직한 일도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다.

 

김인식애국가의 유력한 작사가 중 한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작사가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김인식을 포함해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민영환 등이다. 김인식은 생전에 애국가의 1절을 자신이 지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각 절을 한 명이 쓴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합작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로 봐서 1절은 김인식이 짓지 않았을까 싶다. 

 

20190206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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