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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외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 ) 19630809 - 20120211

by Rainysunshine 2016.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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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그녀와의 첫 만남은 You Give Good Love였다. 저마다 그녀를 만난 시점이 다를 것이고, 따라서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로 첫 인상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휘트니 휴스턴(Whintey Houston)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1985년 당시 나는 빌보드 차트를 매주 듣고 있었고, 멜로디가 귀에 훅하고 꽂히는 음악만을 편식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질적인 차트 데뷔곡인 Hold Me를 먼저 들었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이 밋밋한 훅을 가진 R&B 스타일은 내게 너무 낯설었고 도대체 심심해서 차트에서 점점 상승하는 꼴이 우스웠다. 급기야 3위까지 오를 때는 아무리 들어도 정이 안 가는 이 노래를 그렇게 높은 순위로 올려놓는 미국인들의 고상함에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러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Saving All My Love For You가 히트할 즈음인가에 그녀의 데뷔 앨범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앨범은 또 날 실망시키고 말았다. 앨범커버가 주는 낯섦. 웬 아프리카 여인이 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철이 없었다고 봐 주시길). 그 앨범을 방치해 놓고 있던 나는, 그러다 그 해 12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백 보컬이자 가스펠 가수로 활동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백 보컬로 참여한 세 번째 싱글 How Will I know가 나왔을 때 생각이 바뀌었다. 뮤직 비디오를 통해 업 템포의 발랄한 멜로디와 분위기로 상큼하게 노래하는 그녀의 면모를 보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의 한을 노래하는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확 바뀐 스타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고, 덩달아 그 LP판을 찬찬히 들어보기 시작했다.

 

 

휘트니의 성공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먼저 그녀가 가진 환경을 말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모든 성공은 거의 주변의 인프라와 함께 온다. 그녀는 가스펠 가수인 씨씨 휴스턴(Cissy Houston)의 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곡 중 한 곡인 2집의 I Know Him So Well이 어머니와 함께 부른 곡이다. 또한 사촌 언니인 디온 워윅(Dionne Warwick)이 있다. 언젠가 그래미 시상식에서 발표자로 나온 디온이 봉투를 뜯다 그녀의 이름을 보고 기쁨에 소리 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그녀와 함께 부른 곡들은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대모는 아레사. 그녀와는 1989 It Isn't It Wasn't It Ain‘t Never Gonna Be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악명 높은 그녀의 남편이 있다. 그는 그녀의 재능을 말살시킨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바비 브라운(Bobby Brown)이다. 둘은 1989년 소울트레인 뮤직 시상식에서 만나 1992년 결혼했다. 바비는 음악계에선 뉴 잭 스윙의 황제로 평가받고 있지만 연하남과의 결혼을 피해야 할 이유로 꼽히는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휘트니2009<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자기보다 높은 인기에 대한 남편의 질투, 폭력, 폭언, 정식적 학대, 그의 간통, 스캔들, 체포 등으로 인한 불안정한 생활로 마약에 의지하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그녀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가끔 듣는 I Wanna Dance With SomebodyWho Do You Love의 웃음소리와 오버랩 되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둘이 같이 부른 노래로는 Something In CommonMy Love가 있다.

 

거기에 흔히 그녀의 성공을 아리스타 레코드 사장인 클라이브 데이비스(Clive Davis)의 공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그녀는 최고를 향한 수련을 쌓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클라이브가 아니었더라도 성공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할 때 이미 10대의 나이로 자주 따라다니며 무대 경험을 쌓았다. 14살에 마이클 재거 밴드(Michael Zager Band)의 싱글 Life’s Party에 참여했고 그 모습에 반한 마이클은 그녀에게 지속적인 레코드 계약에 대한 구애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학교를 마쳐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거절한다. 15살에는 샤카 칸(Chaka Chan) I’m Every Woman(뒤에 리메이크해서 히트하는 그 노래 맞다),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 등의 노래에 백 보컬로 참여한다. 또한 빌 라스웰(Bill Laswell)이 이끄는 그룹 매트리얼(Material)의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해 Memories라는 곡을 불렀다. 레코드 경력뿐만 아니라, 카네기 홀 공연 중 엄마 옆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사진작가에 발탁되어 모델로도 활동한다. 글래머, 코스모폴리탄 등의 패션잡지 지면을 장식했으며 흑인 최초로 17이란 잡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아리스타 레코드의 A&R(캐스팅을 비롯한 제반업무) 담당자 제리 그리피스(Gerry Griffith)의 눈에 띄어 그의 강력한 요청으로 클라이브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이미 디온아레사가 아리스타 소속이었던 까닭에 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데뷔 앨범부터 승승장구 한다. 지면상 1위곡만 언급하자면 1집의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Greatest Love Of All, 2집의 I Wanna Dance With Somebody, Didn't We Almost Have It All, So Emotional, Where Do Broken Hearts Go 등이 있고 3집에서는 I’m Your Baby TonightAll The Man That I Need, 초대박이 난 영화 <보디가드(Body Guard)>의 사운드트랙에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보이즈 투 멘(Boyz Men)One Sweet Day를 통해 깨지기 전까지 빌보드 싱글 차트 최장기간 1(14)를 유지했던 I Will Always Love You가 있다. 그녀의 마지막 1위곡은 나온 지 일주일 만에 차트에 오른 영화<사랑을 기다리며(Waiting To Exhale)>Exhale이다. 이후 그녀는 1999년까지 해마다 톱10 히트곡을 배출했다.

 

하지만 이후 2001911의 여파를 타고 6위까지 오른 The Star Spangled Banner를 끝으로 톱40 한 곡 내지 못하며 약물로 인한 초췌한 사진만이 가끔 가십 란을 장식하곤 했다. 그녀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지나친 마리화나의 남용으로 이때부터 목소리에 힘이 떨어지고 자주 갈라졌으며 불안정해졌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모두 알다시피, 휘트니2012212L.A.의 비벌리 힐튼 호텔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화 <스파클(Sparkle)>의 작업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그래미의 전야제 격인 클라이브 주최 갈라 파티를 불과 몇 시간 앞둔 시각이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디바 가운데 하나가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기네스에 의하면 그녀는 2010년까지 415개의 상을 받아 역사상 최고로 상을 많이 받은 여성 가수로 기록되어 있다(안타깝게도 데뷔 이전에 이미 테디 펜더그라스(Teddy Pendergrass)와함께 Hold Me란 곡을 불러 차트에 올랐기 때문에 그래미 신인부문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판매량, 빌보드의 기록 등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입만 아플 뿐이다. 그녀의 자세한 기록은 앞으로 추모 열기 속에서 계속 상기되고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진짜 주인공은 이런 화려한 성적을 낳게 한 그녀의 목소리다. 대중음악은 흔히 악기와 목소리의 조화라고 정의 내려지지만, 그녀는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디바 중의 디바다. 그 아우라를 흉내 내고 싶은 많은 후배들이 창법을 따라했지만 부드럽게 흐름을 타면서 장엄한 숭고미를 주는, 그렇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보컬을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교로 다가갈 수 없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NFL 슈퍼볼 게임에서 불렀던 The Star Spangled Banner. 당시 걸프전의 여파도 있었지만 이 미국 국가는 마스터링 된 음악만을 듣던 우리에게 현장음 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순간이었다(역대 그 누구와 비교해도 좋다). 아마 이전 세대는 이전의 다른 가수들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동시대를 산 것에 대해 기꺼이 감사와 경의를 표하겠다. 가수가 좋은 노래를 만나는 것보다 노래가 좋은 가수를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축복이다.

 

20120213 다음뮤직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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