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시나위를 나온 서태지는 시퀀서로 곡 작업을 시작했다. 지독히도 기나긴 시간이 걸린 난 알아요의 데모는 놀랍게도 록 밴드의 주자가 가진 마인드와는 한참 떨어져 보이는 랩송이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MC 해머(Hammer),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등의 흑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말로 된 랩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힙합에 대한 정식코스를 밟기 위해서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으며(비록 춤 선생의 군 입대로 금방 깨졌지만), 데모 테이프가 완성 된 뒤에는 양현석과 그와 춤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던 댄스 황제 이주노를 맞아들여 댄스 팀을 만들었다.
이들의 데뷔 곡 난 알아요는 순식간에 차트를 점령했고 앨범은 반도를 열광으로 몰아넣으며 신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미국에서 얼터너티브로 발흥한 X세대와 맞물리는 음악적 혁명이었다. 하지만 기성 세대의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데뷔 무대에서 이들은 전영록, 하광훈, 양인자, 이상벽 등의 선배들에게 질타를 당했으며 음악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기성세대들은 “무국적의 음악”이라느니, 꼬리표 달린 의상들을 보고 “돈에 물든 신세대가 밀집하는 압구정을 대표하는 문화”라고 힐난을 서슴치 않았다. 이제껏 본격적인 랩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던 세대들은 말세라며 경악했고 신세대들은 자신들의 감성을 자극한 듣기 좋은 새로운 음악에 열광했다. 하지만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국내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며 트렌드를 만들어버린 이들을 이후엔 아무도 제지할 수 없었다.
데뷔 앨범에서 난 알아요로 정상을 차지한 이들은 후속곡 환상 속의 그대로 다시 한 번 권좌를 두들겼다. 그리고 전곡이 라디오를 타며 앨범의 완성도와 작곡, 춤,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 실력을 증명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들이 랩으로 성공하자, 아류들은 급속히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반사 이익을 얻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그룹은 무수한 그룹 들 중에서 잼과 노이즈였다. 하지만 2집이 발매되자, 게임은 쉽게 끝나버렸다. 하여가는 간주가 긴 곡임에도 몇 달간이나 계속 울려 퍼졌으며 이들은 댄스 그룹이 아닌 공일오비, 신승훈, 김수희 등과 경합을 벌였다. 2집 역시 전곡이 전파를 탔으며 가을에는 발라드 너에게가 인기를 얻었고 완벽한 수록곡들이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무엇보다도 2집의 공로는 하여가에서 보여준 국악에 대한 환기였다. 우리는 대중음악과 국악의 융합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국악은 끊임없이 대중 가수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들은 2집으로 모든 뉴스와 신문 지면을 장식했으며 어떤 적수도 이들과 같이 음반 활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설문조사 순위에서 각종 명사들을 제치고 1, 2 등을 다투었다.
얼터너티브 록을 수용한 3집은 발해를 꿈꾸며와 교실이데아가 청소년들의 정서에 깊숙이 개입했다. 청소년들에게는 듣기 편한 음악이 아니었음에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오히려 성공을 시기한 기성 음악가들이나 사회 지도층에서 악성루머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팬들은 음악에 대한 절대 신뢰를 보냈으며 이것은 솔로로 독립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0대의 대통령으로 자리 잡으며 무소불위의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이들은 Come back home이 정상을 차지했던 4집을 끝으로 은퇴를 결심한다. 창작의 고통을 호소했던 이들의 마지막 자리는 곧바로 10대들의 정신적 공황으로 이어졌고 음반 구매욕은 최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댄스에 역점을 두고 있던 팀의 발전을 위한 해체 수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서태지의 자유로운 음악적 역량을 위한 전초기지로 해석할 수 있다. 두고두고 말이 많았던 은퇴라는 단어도 자신에게 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기 위한 비책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문화적 충격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들은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음악, 춤에 뛰어든 당당한 표상으로 드롭아웃의 자기주장을 본격적으로 연 최초의 아티스트이며, 좋지 않던 춤에 대한 인식을 밝고 신선한 것으로 바꿔 놓았고 댄스 음악의 시대를 열어 춤꾼들의 세상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랩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했으며, 매번 라이브 음반을 발표하며 라이브 공연의 중요함을 인식시켰다. 의상과 뮤직 비디오에 신경을 써 비주얼 세대의 공감을 얻었으며, 공연 뒤에는 앨범 작업에 들어가 가수와 연예인의 경계를 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린 해낼 수 있어”와 같은 가사로 신세대간의 화합을 도모해 훈계조의 기성세대와 구별 지었다.
모두 알다시피 이들 셋은 아직도 음악계에서 주요한 권력자로 자리 잡고 있다. 서태지는 솔로 음반으로 여전히 지지자들과 적대자들의 신경 속에 있으며, 양현석은 힙합계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DJ와 솔로 음반으로 활동하는 이주노는 제작자로 소신 있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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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 [2000's/2001] - 프로스펙스 - 서태지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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