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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9

서지원 (박병철) 19760218 ∼ 19960101 “2집 활동을 앞두고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군대도 가야하며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에도 너무 벅차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홍보를 잘해 2집을 성공시켜주기를 빈다.” - 서지원 일기장 서지원은 2집 출반을 앞두고 스스로 자기의 숨을 거두었다. 어린 나이에 찾아온 부모의 이혼과 삶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이 그를 질식시킨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음을 통해 이 복마전의 세상을 뚫고 나가려 했고 사후에 그의 음악은 재평가되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 힘든 세상을 돌파할 수가 없다. 다만 그로 인해 인기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가수들의 비애를 공감할 수 있을 뿐이다. 서지원은 강수지를 필두로 이현우, 솔리드 등 재외 한인들이 90년대 초중반 국내에 들어와 가수로 데뷔할 때의 .. 2015. 12. 27.
김완선(김이선) 19690516 김완선이 한창 인기 있을 때 애석하게도 난 그녀의 손동작 하나에 쓰러지는 무리들에 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글을 준비하면서 과거의 자료들을 보니 그녀가 정말 착하고 예뻤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포인트는 ‘착하다’는데 있다(믿거나 말거나). 그래서 조금은 애석하다. 가까워질 수 있었던 좋은 친구를 뒤늦게 알아본 기분이다. 그렇다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아주 좋아한 가수를 10으로 놓는다면 김완선의 경우, 적어도 8은 된다. 앨범 위주로 꼼꼼하게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춤을 모사했던 친구들처럼 비주얼에 열정적이지 않아서, 친구들의 “예쁘지 않냐?”는 의견을, 또는 TV 속에서 빛나던 그녀의 모습을, 등한시했는지도 모르겠다. 은퇴 전 그렇긴 했어.. 2015. 12. 5.
송창식 19470202 개인적으로 송창식의 외적 모습은 TV에 나와 가나다라를 부르던 이미지가 제일 강하다. 마이크 잡느라 한 팔만 옆으로 뻗었던 것 같기도 하고 두 팔을 다 옆으로 뻗었던 적도 있던 것 같아 자세히 기억할 순 없지만 당시 이 노래를 부를 때의 제스처는 상당히 파격적으로 다가왔었다. 국악에 대한 조예가 전혀 없었어도 꽹과리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인트로와 자유스러웠던 분방함에 저절로 흥이 났고 귀에 쏙쏙 박히는 멜로디 덕분에 가사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어도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의 계보를 외울 수 있었다. 기존 가수들의 무대와 너무 달랐기에 불쾌하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래서 당시 대통령이 싫어해 TV에 더 이상 나올 수 없었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때까지.. 2015. 11. 21.
영턱스클럽(Young Turks Club, YTC) 서태지와 아이들은 해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여행으로 달랬다. 그러던 중 이주노가 라디오 DJ를 제의 받아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고 양현석도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둘은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다. 이주노가 제작에 대한 포부를 밝히자 양현석은 서두르지 말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주노는 투자라기보다 그룹 활동으로 쌓은 막대한 부에서 조금(2억이라고 밝혔다) 떼어 후배들을 위해 쓴다는 개념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실패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한현남, 송진아, 지준구에 원래는 양현석 라인이던 최승민을 스카우트 해 한 팀으로 묶은 이주노는 ING라는 기획사를 차리고 확실한 메인 보컬이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혼성그룹 투투에서 황혜영과 자리다툼 끝.. 2015. 9. 26.
신해철 19680506 - 20141027 1990년대 이후 단연,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뮤지션의 한 사람은 신해철이다. 그 가치는 캠퍼스 밴드 무한궤도의 리더로서, 틴 아이돌의 스타로서, 그리고 다시 1990년대 최고의 록그룹 넥스트(N.EX.T.)의 수장으로서, 크롬(Crom)이란 이름의 테크노와 국악을 실험한 장인으로서, 다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라는 그룹의 이름으로 만들어낸 다양한 음악적 변동지수가 말해준다. 이렇게 촉수가 닿는 대로 뻗어 방대한 계보를 만들어 낸 그의 이력은 주류와 비주류를 좌충우돌하며 장르를 핍진적으로 개척해 낸 공로가 있다. 무한궤도 멤버들은 음악이라는 불안한 미래를 자신의 탄탄한 미래와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신해철은 대마초를 찾을 만큼 힘들게 겪었고 이 때의 쓰라린 상처는 그의 초창기.. 2014. 11. 1.
박성연 1955 ~ 20200823 김상희, 임희숙, 윤희정, 말로, 서영은, 나윤선, 웅산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 여성 재즈 보컬의 맨 앞에는 박성연이 있다. 기라성같은 이 이름들 앞에서 그 세월의 깊이만큼 우리나라 재즈 음악의 산 증인이 되고 있는 되었다. 거기에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재즈를 지키는 여신으로 수절하고 있다. 아마도 이 뚝심의 여장부는 역사가 되리라. 트럼펫을 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베니 굿맨(Benny Goodman), 글렌 밀러(Glenn Miller), 마리오 란자(Mario Lanza) 등의 음악을 어린 시절부터 들을 수 있었던 박성연은 그 덕택에 남들보다 빨리 재즈에 귀가 트일 수 있었다. 이 어릴적 자산은 취미가 되었고 취미는 특기가 되어 고교 졸업 후 미8군 쇼 단체의 오디션 광고를 보고 찾아가도록 결정적.. 2014. 3. 2.
이지연 19701031 수없이 떴다 지는 연예계의 크고 작은 별들처럼 이제는 옛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반짝거리고 있지만, 이지연이란 이름은 '90년대의 H.O.T나 2000년대의 보아 혹은 장나라와 같이 '80년대를 대표할만한 틴 아이돌 스타였다. 김완선을 필두로 김승진, 박혜성 등의 10대 스타를 배출한 '80년대의 시장은 그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나긴 조용필의 독주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의 우리 대중 음악은 주현미를 중심으로 한 트로트 진영과 조용필, 전영록, 김수철, 이문세, 윤시내, 정수라, 나미, 이선희 등이 혼전을 벌이던 메인스트림 진영, 헤비메탈과 언더그라운드의 조용한 혁명 등이 힘 겨루기를 하고 있었고 전 세대에 비해 풍요롭게 자랐던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소방.. 2013. 3. 6.
박명수 19700827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조규찬은 “음악이 목적이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했다1). 그의 말에서 우리는 음악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의 탄식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이 정말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음악인들이 예술혼을 불태웠던 시대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중이 주체가 된 지금의 음악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발현하기보다는 다른 어떤 것에 부속품처럼 끼여 소비되고 있으며 표현은 과거에 비해 너무 직설적이다 못해 저급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 만큼 말초적이다. 조규찬의 말은 이런 비슷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이런 안타까움을 견디다 못한 음악인들의 반격은 항상 있어왔다. 2003년 이효리의 득세에 반발한 평론가 진영은 한국대중음악상을 출범시켰으며2) 김도향은 박.. 2013. 1. 20.
퍼니 파우더(Funny Powder) 김호준(실질적 리더, 1975년 6월 30일, Guitar, Rap) 이승복(내면의 리더, 1975년 12월 18일, Drum, Midi) 홍기섭(진정한 리더, 1975년 3월 8일, Guitar, Rap) 2000년, 태양계 세 번째 행성에 속한 나라들 중 대한민국은 한 무리의 외계인들로부터 침공을 당했다. 300세를 넘긴 이들은 Pleione systems GX 339-4 Nexus라는 별에서 왔으며 1996년부터 서울에 잠복해 이듬해에 지구인을 즐겁게 해줄 가루(Funny Powder)를 만들었다. 그것은 ‘음악’이라 부르는 지구에서 보편화된 문화의 한 형태로, 이들은 지구인을 납치해 지구인들이 행복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이 가루를 통해 실험한다.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로 지냈다는 이 외계인들은 1.. 2013. 1. 9.
Kayip(이우준) 1978 일렉트로니카로 대변되는 전자음악계에 있어 새로운 모범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카입(Kayip)은 대학 시절 취미로 음악을 만들다 음악감독 조영욱에 픽업돼 영화 사운드트랙에 참여하며 음악계에 입문했다. 이후 난장커뮤니케이션즈에서 이상은 11집과 이승열 1집, 윤상 5집에 작곡과 편곡자로 가세하며 본격적인 대중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평소 퀸(Queen),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 등 영국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어느 날 현란하지 않고 정적인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음악에 마음을 빼앗겨 하던 건축 공부를 내팽개치고 현대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 버밍엄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수학하면서 현대음악계의 거장 마크 앤서니 터니지에게 .. 2012. 12. 20.
리아 19750802 폭발력 있는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 리아는 고등학교시절 통기타 서클에서 활동하다 친구가 몰래 엽서를 보낸 덕택으로 출연하게 된, 수많은 스타들의 입문기에 등장하는 선견지명을 지닌 친구를 둔 덕택에 가수가 된 케이스다. 그리고 1993년 MBC 라디오 의 별밤 뽐내기에서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The Greatest Love of All로 연말 결선 1등을 거머쥐면서 실질적인 가수가 된다. 하지만 역시 쌍팔년도 이전의 가수들이 하나같이 겪었던 집안의 반대가 공식처럼 등장하고 록 음악을 하고 싶어 여러 밴드 오디션을 전전했지만 여자라는 편견을 깨지 못하고 혼자 노래를 불러야 했던 역사가 더해지면서 힘들었던 미운오리 새끼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EBS TV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사전MC(쇼.. 2012. 10. 22.
윤형주 19471119 영문학박사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윤형주(시인 윤동주와 6촌간이다). 그의 음악 인생은 기타와 함께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성가대원 이였던 그는 같은 교회 베이스 파트의 선배 조영남이 부르는 Cotten fields를 듣고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급기야 기타를 한번 만져보기 위해 선배를 졸졸 따라다녔으며 대학에 들어가서는 완고한 아버지를 졸라 꿈에 그리던 통기타를 얻어냈다. 그리고 200여 곡의 팝송을 외우며 기타에 빠져들었다. 연대 의대에 들어갔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친구 이익근과 함께 트윈 폴리오란 그룹을 결성했으며 얼핏 존 덴버(John Denver)를 연상시키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하모니로 음악 다방의 챔피언이 .. 2012. 10. 13.
들국화 전인권(1954년 9월 4일 : Vocal) 최성원(1955년 2월 9일 : Bass) 주찬권(1955년 3월 18일 : Drum) 조덕환(Guitar) 허성욱(1962년 ∼1997 11월 20일 : Keyboard) 최구희(Guitar) 손진태(Guitar) 신중현, 김민기, 조용필, 들국화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록이라는 정체성을 아우라로 휘감아 역사적으로 생경한 문법을 만들어냈다는 데에 있다. 그 중 들국화라는 그룹이 갖는 우리 음악계에서의 위치는 억압의 사슬을 지나던 시절 터트린 젊은이들의 세계를 대변한 1집을 통해 밴드라는 록 음악이 가지는 뼈대를 건립하고 후에 작가르네상스라 불리는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물고를 텄다는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백하게 우리.. 2012. 7. 8.
서태지와 아이들 1992 서태지 19720221, 이주노 19670210, 양현석 19691202 그룹 시나위를 나온 서태지는 시퀀서로 곡 작업을 시작했다. 지독히도 기나긴 시간이 걸린 난 알아요의 데모는 놀랍게도 록 밴드의 주자가 가진 마인드와는 한참 떨어져 보이는 랩송이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MC 해머(Hammer),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등의 흑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말로 된 랩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힙합에 대한 정식코스를 밟기 위해서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으며(비록 춤 선생의 군 입대로 금방 깨졌지만), 데모 테이프가 완성 된 뒤에는 양현석과 그와 춤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던 댄스 황제 이주노를 맞아들여 댄스 팀을 만들었다. 이들의 데.. 2012. 3. 25.
어떤날 조동익 19600306 이병우 19650122 1980년대 주류의 물살을 탄탄하게 견제해 주던 동아기획의 절정은 들국화였지만, 이 꽃밭을 오래 가꾸며 향기가 떠나지 않도록 한 것은 바로 그룹 어떤날 이였다. 후에 동아 기획에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던 친구 최진영의 소개로, 두 스타일리스트, 이병우와 조동익은 첫 악수를 나눈다. 이 만남은 글자 그대로 대중음악의 지형도를 감수성만으로 쏘아 올린 역사적인 순간이다. 조동익은 그의 형 조동진의 2집에 어떤날이라는 곡을 주며 음악계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조동진이 칭찬했다는 이 곡은 곧 이들의 팀 이름이 됐으며 허영자가 쓴 가사처럼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음악으로 전설을 만들어 간다. 이들은 1985년 최성원이 기획한 에 너무 아쉬워.. 201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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