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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9

임종환 19640417 - 20100523 싱어송라이터 장덕의 추모앨범에서 내가 만나는 하나님께라는 곡으로 음악계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한 임종환은 1980년대에 인생별곡으로 인기를 모았던 통기타 가수 이용식의 지도아래 난 널 믿어란 곡을 발표하면서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와 같은 느낌의 이 곡으로 자주 변진섭으로 오해 받았던 그는 1집에서 기다림은 기다림으로나 내가 아닐 꺼야, 유리창에 비친 슬픔과 같은 곡으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레게음악을 처음으로 연구하고 도입했던 벗님들 출신의 김준기가 프로듀서로 나선 그의 두 번째 음반은 온통 레게의 숨결이 느껴지는 음반이다. 김건모의 핑계를 시작으로 마로니에, 투투, 룰라, 닥터레게, 김흥국 등으로 인해 90년대에 랩과 함께 새로운 문법의 하나로 떠오.. 2012. 2. 7.
장덕 19620421 ∼19900204 “잊지 말아요/ 우리의 사랑을/ 잊지 말아요/ 우리의 기억들을/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한창 성장기에 있던 약관의 한 뮤지션은 이와 같이 이별의 가사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모든 음악인의 죽음은, 팬들에게 공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기 마련이지만 나이 어린 스타일수록 그 황당함은 배가된다. 우리 음악계의 지각변동을 바로 목전에 둔 1990년,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장덕은 '80년대 추상적이고 모호했던 가사를 가지고 있던 음악들의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당시 10대들이 품고 있던 생각을 표출할 수 있었던, 신세대적 감각이 출중했던 프로듀서 중의 한 명 이였다. 그녀의 음악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한 결 같이 어둡게 이별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2012. 2. 6.
현철 19450617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트로트란 장르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3번에 걸쳐 융기한다. 그 첫 번째는 당시 주류였던 창가, 신민요를 제치고 서민의 품으로 들어온 일제강점기 후반의 일이며 두 번째는 이미자를 필두로 남진과 나훈아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60년대,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주현미와 소위 트로트 4인방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서구대중음악보다 먼저 입장해 장구한 시간을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트로트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얻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주도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주장 때문이다. 거기에 1980년대 후반의 인기는 관과 방송사가 연합한 결과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 거세게 일어난 트로트의 봉기는 정.. 2012. 1. 4.
장혜리 19630116 장혜리(장정희) 19630116 장혜리는 19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에 활동하며 5장의 앨범을 발표했음에도 전반적으로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라는 한 곡만이 히트한 원 히트 원더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가수다. 공무원가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집안 분위기에 힘입어 고교 졸업 후 공업진흥청에서 비서로 근무했다. 그러다 여러 차례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반한 직장상사가, 알고 지내던 작곡가 길옥윤에게 소개함으로써 가수의 길로 방향을 전환한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길옥윤을 찾아가 사랑의 미로와 그때 그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18개월간의 조련 끝에 드디어 1986년 오늘밤에 만나요라는 트로트 분위기의 댄스곡으로 데뷔를 한다. 길옥윤 작품집이라 볼 수 있는 .. 2011. 12. 27.
조영욱 1963 우리의 영화음악은 각각의 연대에 히트작이라 불릴만한 것을 적어도 한 작품씩 배출했다. 1960년대에는 작곡가 백영호가 만들고 이미자가 불러 당시 축음기가 있는 사람은 모두 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 1970년대에는 이장희가 만들고 불러 술집 아가씨와의 로맨스 붐을 일으킨 , 1980년대에는 강인원이 만들고 권인하, 김현식 등과 불러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던 , 그리고 1990년대에는 아마도 최초의 스코어 성공작이라 평가할 수 있는 김수철의 와 음악감독 조영욱이 곡을 골라 세팅했던 영화 의 O.S.T.가 그것들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음반판매량의 전반적인 저조와 더불어 판매고가 기존보다는 높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조영욱이 음악을 담당한 에서 심현정이 작곡한 미도의 테마가 히트되었고 2000년대의 대표적인.. 2011. 12. 23.
고복수 19111119 - 19720210 어린 시절 유성기를 너무 좋아해 나오는 곡마다 따라 불렀던 고복수는 경상남도 울산의 기계국수집을 하던 잡화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 이미 교회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었고 보통학교에서는 언제나 학예회 마다 뽑혀나가 창가를 불렀다. 23살 때 조선일보가 후원하고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했던 콩쿠르 부산지역예선에서 1등을 차지한 그는 부모 몰래 금고에서 60원을 빼낸 뒤 부푼 가수의 꿈을 안고 곧장 서울행 밤 열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서울 본선대회에서 지정곡인 두견새 우는 밤(비견)과 자유곡 처량한 밤(낙화암)을 불러 3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여자 입상자들에게 빼앗겨 음반 발매가 늦어졌다가 당선자 발표 음악대회에서 OK 레코드 사장 이철의 이목을 끌어 이후 .. 2011. 12. 14.
윈터플레이(Winterplay) 이주한(트럼펫, 19651220), 최우준(기타, 19770105), 소은규(콘트라베이스, 19731101), 혜원(문혜원, 노래, 19841115) 트럼펫, 기타,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혜원의 목소리가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는 쿨재즈, 그리고 거의 영어 가사로 일관하여 국내 팬들로 하여금 팝송을 듣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윈터플레이는 이주한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위해 모인 일회성의, 프로젝트성향의 그룹 이였다. 누보 송, 누보 두 같은 작업을 하며 자신의 음악에 있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이주한은 인터플레이, 이병우의 뮤직 도르프에서 활동했던 소은규, 2011. 12. 6.
주현미 19610927 주현미 19610927 우리대중음악계에 있어서 다른 시대 못지않게 1980년대에도 많은 거성들이 있었다. 최고의 왕관은 언제나 조용필에게로 돌려지지만 후대의 영향력에 있어서만큼은 들국화, 어떤날, 그리고 유재하가 최고의 뮤지션이다. 하지만 트로트분야로 넘어오면, 남녀를 통틀어 주현미가 그 영예를 차지한다. 실상 주현미는 트로트뿐만 아니라 메인스트림에서도 조용필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용필의 아성에 도전한 김수철, 이용 등은 정상권에 오르자마자 조기 탈락했고 전영록은 90년대 초반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전국을 뒤흔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주현미의 인기가 후대에 방송사의 조직적인 트로트 지원에 힘입었다는 이유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녀의 이력을 보면 인기의 유지와 롱런의 힘은 언제나 노력에서 나온다는 .. 2011. 12. 3.
박근태 1972 박근태 1972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대표 작곡가 중 한 명이 된 박근태는 많은 뮤지션들이 그렇듯 기타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잡으면서 음악세계에 발을 디딘다. 중2 때는 고교생들과 그룹을 만들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기성세대의 록밴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한계를 느낀 그는 고2때 기타를 과감히 버리고 컴퓨터 장비를 장만하며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곡을 부를 가수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곡을 만들었다. 그의 인생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빼고서는 말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대학입학 후, 본격적인 프로 작곡가의 길로 가기 위해 두들긴 기획사들은 모두 그의 곡을 외면했다. 대학을 팽개치고 신인가요제출신 밴드의 백밴드로 공연 세션을 하며 지내던 그는 박준하의 매니..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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