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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9

대한민국 대중음악 노래 Index *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우리나라 음악 리스트입니다. 오른쪽 맨 위의 돋보기에서 검색해 찾을 수 있습니다.   2NE1(투애니원) - Fire10cm(십센치) - 아메리카노                               봄이 좋냐??  가을방학 - 동거 가호 - 시작  강백수 - 타임머신 강산에 - 넌 할 수 있어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강인원 - 비오는 날 수채화  검정치마 - 기다린만큼 더  고복수 - 타향살이  꽃다지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 젊은이  구하라 - 초코칩 쿠키  규현 - 광화문에서  금과은 - 처녀뱃사공  김광민 - 안나 김광석 -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사랑했지만    .. 2024. 5. 13.
최혜영 1963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최혜영은 대학생이 되면서 1981년 그대를 잊으려는데라는 곡으로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지만 입상하진 못했다. 그러다 언론사에 재직하던 아버지의 소개로 지구 레코드사와 연결이 되었고 꿈에 그리던 가수의 세계로 다가서게 되었다.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은 아! 대한민국의 작곡가 김재일이 곡을 쓰고 당시 최고의 작사가인 박건호가 노랫말을 붙인 그것은 인생으로 정해졌다. 앨범은 1983년 12월에 발매되었고 최혜영은 1984년 1월 1일 KBS 출연을 통해 메이저 신고식을 치른다. 그리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일화의 주인공처럼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그것은 인생은 TV 전파를 타자마자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녀는 바로 일간지에 소개 되었다(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이었는지는 .. 2021. 2. 21.
애드 포(Add 4) 1962 ~ 1966 애드 포(애드 훠, Add 4)는 국내 록 음악사 최고의 기타리스트, 작곡가, 프로듀서로 평가받는 신중현(申重鉉)이 결성한 밴드로 국내 최초의 록밴드로 기록되고 있다. 빗속의 여인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록음악으로 평가받는 곡을 남겼고 2장의 앨범만을 발표하고 해체했다. 1960년대 초부터 미8군의 인기는 식기 시작했다. 물가는 오르는데 뮤지션들에게 지급했던 월급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미8군에 인력을 대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인원을 줄여 회사의 수지를 맞췄다. 신중현은 이런 시장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1962년 패키지 쇼그룹 클럽 데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더 이상 미8군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중음악 시장을 겨냥한 애드 포를 결성했다. 당시에는 LP에 들어갈 곡의 레퍼토리가 완성되어야 .. 2020. 10. 7.
장연주 19781215 변화무쌍한 목소리로 발라드부터 록음악까지 모든 장르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며, 가수로서 더할 나위없는 역량을 보유한 장연주는 네 살 때 처음 앉은 피아노 건반 앞에서 동요를 척척 쳐내더라는, 그녀 어머니의 전설적인 이야기로 음악역사를 시작한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런 내공으로 상을 타고 대학에 가서도 혹독하게 자신을 다스린다. 데뷔 전까지의 삶은 한마디로 음악을 위해 태어난 선천적 재능의 보유자로서의 낭중지추 그 자체다. 어린 시절 이승환, 신승훈, 김민우, 조정현 등 발라드 가수들의 곡을 줄줄이 외우면서 라디오와 행복한 꿈을 꾸던 그녀는 수업 시간에 나가 이승환의 텅 빈 마음을 부르던 바로 그 순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신 내림을 받는다. 이 날의 형언할 수 없는 물아일체의 경험.. 2020. 8. 24.
유재하(柳在夏) 19620606 ~ 19871101 1987년 11월 1일 새벽 강변북로를 달리던 포니2가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충돌했다. 거기에 타고 있던 꿈 많은 미완의 25살짜리 음악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즉사했다. 그렇게 유재하라는 천재의 전설은 시작된다(유독 술을 좋아했던 그는 술 취한 친구의 음주운전 차를 타고 가다 변을 당했다. 이후 그 친구의 부모는 4천4백60만원이라는 배상 판결을 받는다). 유재하 음악 장학회 이사를 맡고 있는 바로 위의 형 유건하는 유재하의 마지막 말을 기억한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해치우고 올게~." 유재하는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유일청 - 1989년 작고)와 어머니(황영) 사이에 3남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 그는 소위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 2019. 11. 1.
채규엽 1906 ~1949 채규엽(蔡奎燁, 하세가와 이치로, 長谷川一郎 하세가와 이치로, 1906년 ~ 1949)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전까지 활동했던 가수로, 국내 최초의 직업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1920년대 중반에 일본 동경 중앙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한 그는 1928년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졌고 1930년에는 근화여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했다. 성악을 공부한 경력 때문에 일본 콜럼비아의 경성지부 설립 축하연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가수로 데뷔하였다. 봄노래 부르자, 유랑인의 노래,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더냐, 봉자의 죽음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고 1935년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설문조사인 매일신보 잡지 삼천리 구독자 투표에서 남자가수 1위를 차지했다. 강석연(姜石燕)과 부른 봄타령은 불러 우리나.. 2019. 4. 14.
이상준(李尙俊) 1884 ~ 1948 이상준(李尙俊, 1884 ~ 1948)은 김인식, 김형준과 더불어 초기 양악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특히 김인식의 족적과 업적을 더욱 발전시킨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상준은 김인식이 재직하던 조선정악전습소(조양구락부)에 입학해 김인식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이상준은 조선음악 쪽이고 김인식은 서양 음악부 쪽이라 수제자라고 볼 순 없지만 김인식에게 배운 서양음악 이론으로 악보를 채보하는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하게 된다. 이상준은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2살에 서울 정동의 피어슨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풍금과 서양음악을 배운 그는 15살에 평양으로 가 대성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계속 유명한 학교들을 옮겨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상준은 기존의 음악들을 서양 악보로 채보하는 작업을 꾸준.. 2019. 2. 10.
김인식 18850919 ~ 19620217 김인식(金仁湜, 18850919 ~ 19620217)은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였고 최초의 서양음악 형식의 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음악 스타일은 선교사들로부터 배우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유교적 사고를 지닌 아버지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김인식은 평양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기독교 예배당에 다니면서 창가(唱歌)류의 음악을 처음 접했고 평양숭실중학교 재학시절 성악, 오르간, 바이올린 등을 배우며 음악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해 실력이 뛰어난 조교를 뽑아 월급을 주면서 아래 학년을 가르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김인식도 그런 조교 중 한 명으로 뽑혀 오르간을 치면서 .. 2019. 2. 6.
최진희 19590103 전북 익산(이리) 출신인 최진희는 원래는 성악가나 지휘자를 꿈꾸던 소녀였다. 이미자 노래를 잘 불렀던 친구와 함께 또 다른 방향으로 음악에 대한 열망을 키우던 최진희는 그 친구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을 빌려 지금껏 꿈꾸어 오던 방향과는 다른 쪽의 문을 두들긴다. 서울까지의 차비가 걱정스러웠지만 모든 경비를 대준 친구 덕에 ‘친구 따라 갔다가 자기만 붙었다’는 숱한 전설 속의 인기인들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그리고 별다른 준비 없이 데뷔전을 치른다. 하지만 작곡가 김학송의 지원 아래 발표한 소원은 대중 음악계의 높은 벽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기념 앨범 한 장 내고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는 수많은 도전자들과 달리 당시 최진희가 가졌던 의지는 남달랐던 것 같다. 밤무대를 통해 대중음악을 익히.. 2017. 12. 23.
한명숙 19351201 창가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온 트로트의 강세 속에서 1960년대 초 우리대중음악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다. 바로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시장을 강타한 것이다. 기나긴 애상조의 노래가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아오던 기존의 패턴에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경쾌한 서구 팝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선 이였으며 기존의 여가수가 지니고 있었던 전형적인 꾀꼬리 같은 목소리만의 세상에 종식을 알리는 부고장 이였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난 한명숙은 평양음대 교수인 외삼촌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서양 고전음악을 접하면서 자랐다. 노래에 소질이 있어 합창단원으로 활약하며 음악 대학의 진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인천에 피난 와 살면서 오르간을 치며 노래 연습을 하던 그녀는 우연히 옆집.. 2017. 11. 11.
남진 19450927 1960년대에 우리 음악계는 미국의 대중음악, 그 중에서도 록음악을 체화해내기 시작한다. 일렉트릭 기타로 대변되는 그룹형 록 사운드는 신중현에 의해 토착화되기 시작했고 밥 딜런(Bob Dylan)식의 포크 록은 한대수에 의해 본격적으로 창작된 뒤 캠퍼스를 점령한 기타의 향연과 더불어 대학가에 수놓아졌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에 의해 폭발한 록큰롤, 록커빌리는 1970년대 들어 대중음악의 한복판에서 메인스트림을 장악한 남진에 의해 전개된다. 남진은 당시 국내에 있었던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빠른 노래를 불렀고 가장 격렬한 춤을 선보였다. 서서 노래 부르는 것이 주 업무였던 가수에게 있어 춤이라 부를만한 것의 시작점을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의 첫 성공은 울려고 내가왔나.. 2017. 4. 17.
트윈 폴리오(Twin Folio, 튄 폴리오) 국내에서 최초로 세대 간의 경계선을 그은 음악 장르는 포크일 것이다. 포크 음악 부흥(Falk Revival)을 통해 포크록이란 장르를 탄생시킨 이 미국의 민요는 비록 그 뿌리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이지만, 그 취지만은 살아남아 1970년대 저항과 반항의 정신을 뿌리 내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해냈다. 그래서 운동권이란 이름의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음악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맥주와 청바지, 통기타로 상징되는 젊은 문화의 박제가 되었다. 포크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전, 우리의 대학생들은 음악 감상실을 통해 자웅을 겨루며 이미 폭넓은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세시봉, 오빈스 캐빈 등의 음악다방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조영남, 이익근, 강근식, 유종국 등의 캠퍼스 스타들이 진을 치.. 2017. 1. 1.
김추자 19510102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이제는 역사 속에서 하늘 거리는 이 표어는 1970년대 초반 남한을 강타한 한 여성 가수, 김추자를 깨우는 비문이다. 김추자는 1969년 대학 진학을 위해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어릴 때부터 내리 반장을 지내면서도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던 이 당찬 소녀는 대학 신입생을 위한 노래자랑대회에 나가 솟구치는 가창력으로 1등을 차지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고 무조건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주위의 핀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작정 당시 히트곡 제조기로 소문났던 신중현을 찾아간다. 이는 김추자의 형부 소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당돌한 소녀가 앞에 나타나자 신중현은 "대어감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몸을 감쌌다. 그러나 겸손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고 .. 2017. 1. 1.
이승환 디스코그라피 1989 - 2001 B.C 603 (1989) 나미, 소방차 등의 댄스 음악 계열이 많은 사랑을 얻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발라드의 한 세대를 책임졌던 1980년대 말에 등장해 발라드 가수의 계보를 잇는 듯했던 이승환의 데뷔 음반이다. 엄청나게 큰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지만 시작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대학을 팽개치고 딴따라의 길에 들어섰지만 주 록음악에 심취한 이 청년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10여 군데의 소속사를 전전하며 오디션을 봤지만 퇴짜를 맞아야 했고 서울음반을 만나서야 데뷔 앨범을 발표할 수 있었다. 반 이상의 곡을 자신의 곡으로 채우며 본인의 색깔을 내세웠지만 류지화의 텅빈 마음과 오태호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가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 그를 발라드계의 새로운 왕자로 부추겼다. 그러나 라디오가 주요한 매체로 각.. 2016. 12. 4.
박경희 19500600 - 20040809 지금처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들의 백가쟁명이 한 창인 경우는 아니지만 과거에도 이런 대회는 있었다. MBC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TBC 젊은이의 가요제, 해변 가요제 등이 신인을 발굴하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맥을 같이 한다면 1974년 한국일보에서 개최한 한국가요제는 신인과 기성 모두가 도전할 수 있는 대회였다. 기성의 가수들이 간간이 보인다는 측면에서는 지금의 M.net 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60여 명의 일반인을 평가단으로 구성한 점으로 보아 MBC 모습도 보인다. 이 대회를 기획한 사람은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정홍택으로, 그는 일본의 야마하 국제가요제를 보고 우리도 이런 큰 행사 하나쯤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응모한 곡 수는 345편, 상금은 100만원이었는데 그 가운.. 2016.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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