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에 대해 생각해보다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면서 과연 이 시대에 뮤지컬이란 장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그 이유는 지금껏 보아왔던 뮤지컬들이 주는 성격의 메시지와 달리 <대장금>에서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읽었기 때문이고 내 생각에 그 메시지는 자본주의의 태동 이래 가장 인간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동안 뮤지컬이란 장르는 음악과 춤, 스토리와 현란한 무대가 다였다. 하지만 <대장금>은 현 시국과 맞물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인,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의 한 매개체로 다가왔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대중을 교화할 목적을 지닌 민중극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직설적으로, 혹은 논리적인 설명과 철학적 타당성을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이야기는 똑같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도 누가, 어떤 분위기에서 어떻게 말하는 가에 따라 그 감동이 다르다. 어릴 적 할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었던 옛날이야기에서부터 현 최첨단의 기술을 자랑하는 영화까지, 이야기를 세련되게 만드는 기술은 감동을 준다. 우리가 감동되었다는 것은 그 이야기에 설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의 비극이 모든 서양 문화의 원초적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이야기를 설득하는 방식이 전 세대에 비해 충격적이고 새로웠기 때문이며 오페라가 아직까지 공연되는 이유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한 시대의 획기적인 도약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같은 얘기에 꿈쩍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의 색다른 설득방식에 의해 감동되고 결국 그 이야기에 동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무한복제가 가능한 매체와 저장소의 발달로 등장한 TV와 영화,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토대를 다시 한 번 확대시킨 인터넷의 등장을 보라! 우리는 앞으로도 더 더욱 효과적으로 빠르고 재밌게 그럴싸한 설득적 장치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개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주류적 매체로 자리 잡은 TV, 영화, 인터넷을 통한 이야기의 전달 못지않게 우리가 여전히, 이제는 전성시대가 지나버린 장르들인, 연극과 공연, 오페라와 뮤지컬을 소비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자판으로 쓴 편지보다 자필로 쓴 편지가 더 인간적이듯, 이들 장르적 특수성인 사람 대 사람이 만나는 현장감(복제가 되지 않는!) 때문에 우리의 가슴에 한 층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뮤지컬은 음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어떤 영화감독이 영화에 있어 음악이 없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난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음악이야말로 감독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메시지인 것이다. 똑같은 화면일지라도 어떤 악기의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는가에 따라 그 의도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뮤지컬에 있어 음악은 일상적인 대화보다 더 호소력 있으며 오페라의 아리아와 같이 빼어난 멜로디가 있는 노래는, 일단 그 메시지의 동조 여부를 떠나 심금을 파고들게 되어 있도록 모든 분위기를 조성한다.
뮤지컬 <대장금>을 보러 가다
<대장금>하면 아무래도 이영애가 분한 TV드라마의 인물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나는 그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중간 중간 지나가면서, 어쩌다 시간이 잘 맞아서 몇 편 정도를 전체구조와 상관없이 보곤 했다. 주인공 장금은 남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캐릭터로, 온갖 질투와 암투로 가득 찬 정글 같은 궁궐의 수라간에서 고생하다가 점차 의로운 사람들의 눈에 띄어 결국 임금의 병을 고치는 의녀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입지전적의 인물을 그리고 있지만 다양한 차별적 구조를 몇 겹에 걸쳐 설정해 놓고 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다가올 만큼 짜임새 있다. 하지만 TV는 한 인물의 삶을 쫓아가는 것에 비해 뮤지컬은 시대적 배경을 활용해 모든 인간의 삶 속에는 뿌리 깊게 정치적인 것과 철학적인 바탕이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개혁가 조광조를 등장시켜 현대적 해석을 가하는 한편, 장소를 경희궁 숭정전으로 옮겨(뮤지컬 <대장금>은 2007년 예술의 전당에서 처음 공연돼 흥행 참패를 맛 본 적이 있다) ‘고궁 뮤지컬’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작품을 홍보했다. 이런 전략이 들어맞았는지 2008년의 새로운 버전이 성공을 거두었고 이 두 번째 공연 역시 객석을 다 채우지 못했던 2007년에 비해 높은 예매율과 매진을 이어갔다.
이 뮤지컬을 보게 된 날은 2009년 5월 31일이다. 그 날은 이 공연의 마지막 날 이였고 시간도 마지막 회였다. 사전에 작품에 대해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기에 궁에서 하는 뮤지컬이라는 것에 대한 아무런 편견과 의심 없이 간 나는 숭정전만 덩그러니 있는 휑한 세트를 보고 조금 황당해 했다.(공연을 끝까지 보고 난 후에는 오히려 아무런 세트가 없는 것이 더 세트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어둑어둑 해지면서 객석이 가득 차자 푸르스름한 조명의 숭정전은 아름다워 보였으며 한 명 한 명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배우들이 대사를 뱉을 때마다 궐 하나가 관객을 색다른 경지로 몰입하게 해 줄 수 있음을 알았다. 배우들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나왔고 여자들이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한 외모를 꾸미고 있는 데 반해 남자들은 머리 스타일을 현대식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과거와 현재를 모호하게 하면서도 일체감을 주었다. 저녁에서 밤으로 이어지자 일교차가 심한 날은 아니었는데도 추위로 인해 공연 측에서 제공한 담요를 둘둘 말아 뒤집어써야 했다. 하지만 휑한 무대 장치에 볼 것이라곤 숭정전의 고풍스러운 모습뿐인 이 뮤지컬에서 그 어느 작품에서도 맛보지 못했던 메시지의 이끌림을 느꼈다. 거기에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몰입은 더 훌륭한 감상이 되도록 도와준 것 같다.
뮤지컬은 오페라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뮤지컬이 ‘노래’의 예술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직접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오페라와 달리 현대의 뮤지컬은 모두 다(?) 녹음된 MR을 사용해서 오케스트라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뮤지컬은 철저하게 배우들의 가창력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노래를 잘 부르는 배우가 없으면 아무리 스토리가 훌륭해도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런 면에서 <대장금>의 거의 모든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에 걸 맞는 보컬을 보여주었다. 대장금 역을 맡은 문혜원이 발산하는 절정의 목소리, 민정호 역을 맡은 윤희석의 부드러운 보컬, 누워서도 전혀 힘이 들어간 느낌을 주지 않던 중종의 한지상, 시종일관 카리스마로 개혁을 외치던 조광조, 젊은 보수의 피를 대표하던 오경호의 김태환, 그리고 한상궁과 최상궁의 목소리 등은 야외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관객을 몰아의 경지까지 몰고 가 감동을 창조해냈던 절대적 요인이다.
<대장금>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읽다
뮤지컬에서 현란한 무대장치와 화려한 의상은 분위기에 취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 요소가 되었지만, 시나리오가 부실하면 아무리 뛰어난 외관을 가지고 있어도 실망하기 쉽다. 그런 면에서 <대장금>의 메시지는 이 뮤지컬에서 그 무엇보다도 단연 소중한 그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야기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시대만이 갖고 있는 상황과 배경을 감안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행위를 용인한다하더라도 차별적 구조의 양태만 달라졌을 뿐 현재의 상황 역시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차별’이라는 것을 받아 본 사람들에 의해 ‘다 같은 사람인데 왜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할까?’ 라는 아주 기본적인 지점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비단 신분적 차별이 있던 조선시대에서만 볼 수 있지는 않다. 예로부터 우리는 부자와 빈자, 시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어른과 아이, 유신론과 무신론, 유럽과 제3세계, 서양과 동양, 선진국과 후진국, 이성애와 동성애, 장애인과 비장애인, 백인과 흑인과 황인종 등에서부터 지금의 영어와 비(非)영어,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 미국과 제3세계, 클래식과 대중음악, 명문대와 비명문대, 고용주와 고용자, 보수와 진보,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날씬한 사람과 뚱뚱한 사람, 이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등의 셀 수 없이 많은 차별적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를 ‘말하는 로봇’이라고 생각했듯 인간은 예로부터 사람은 서로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으며 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상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항상 이런 생각을 억누르려 해왔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프랑스혁명에 의해 부르주아가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떠오른 이후 ‘우리는 모든 인간은 다 평등하다’는 대의에 동의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얻어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결과물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날 것 같았던 차별은 이들이 기득권이 되면서 다시 생겨났다.
물론 위와 같은 문제들은 민주주의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아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순간에 있어 ‘능력에 따른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혼동한다.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자본주의 노선을 노골화하면서 우리는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기회마저 박탈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대장금>에는 이 모든 것들이 녹아 있다. 그녀가 가진 신분은 모든 행위에 있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녀의 뛰어난 능력 역시 폄하되며(어린 시절 나는 이런 차별 행위를 선생님으로부터 목격한 적이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농구를 잘하면 “넌 공부도 잘하면서 농구도 잘하는 구나”라고 말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농구를 잘하면 “공부도 못하는 게 농구는 잘해서 뭐하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시종일관 시기와 질투 그리고 끝없는 모함에 시달린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절대 뛰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각이 존재한다. 지난해 국제중학교 설립에 대한 논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사회는 돈이 많으면 자연히 모든 부분에 있어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지어 돈이 많은 집의 아이들은 돈이 적은 집의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등치시킨다. 뮤지컬을 보면 롤즈(J. Rawls)가 <정의론>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미국의 소수자 우대(Affirmative action)와 같은 농어촌 지원의 예산은 깎으면서 등록금내기에 그렇게 힘들지 않은 가정에게는 관대한 대출을 허용하고 기득권에 대한 처벌과 평범한 사람에 대한 처벌이 다른 사법부를 보면서 조선시대 신분이 지닌 차별적 구조가 여전히 이 땅에서도 유효하게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궁에서 노래를 타고 들려오는 메시지에 취하다
나의 이 심각한(?) 해독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금의 신분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설정해야 이야기의 재미가 주는 대장금의 고군분투에,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왜 힘들게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한 인간의 모습에,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단 4명만의 평민이 과거를 통한 신분상승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그 구조를 보는 것이 아니라 4명을 신화화해서 다른 평민들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귀족들의 의도적인 차별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4명만을 찬양하는 것처럼 대장금을 성공의 상징적인 인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앞서나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계속해서 우리의 심금을 자극하고 통쾌하게 만들고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은 현실의 모순이 우리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뮤지컬을 제작한 송승환의 의도나 글을 쓴 오은희, 곡을 만든 이지혜의 의도가 나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다시 한 번 깊게 성찰하도록 도와주었다는 데 대해서, 너무나 강력한 사운드 덕분에 혹시 국가적 보물에 해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고궁을 한 번 밟게 해주었다는 데 대해서, 무엇보다도 ‘뜻을 높이 세우소서’와 같이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편안하게 사유하도록 도와주었다는데 대해 나는 독자에 무게를 두는 해석학 편에 서고 싶다. 노래가 있는 한, 거기에 강력한 메시지의 힘을 보탠다면, 뮤지컬은 인간의 문화에 있어 그 어느 장르보다도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20090531 / 20111130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바람에 물어볼까 그대의 소식
잘 있을까
아무 힘 없이 보내버린
바보같은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 보였죠
억울한 음모 더러운 속임수에
두뺨에 흐르는 그대의 눈물
당신이 날 구했듯
이제 내가 당신을 구하겠소
[1930s/1930] - I Got Rhythm - Ethel Merman
[1930s/1935] - Summertime - George Gershwin
[1960s/1961] - America - Leonard Bernstein & Stephen Sondheim
[1980s/1982] - Tomorrow (White House Ver.) - Aileen Quinn
[1980s/1984] - One Night In Bangkok - Murray Head Feat. Anders Glen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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