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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

미8군쇼

by 현지운 Rainysunshine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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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는 US 미8군이 주둔하고 있고 미8군쇼는 대한민국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무대였다. 전국 각지의 미군 주둔 캠프 내 미군 클럽이 주 무대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 미군위문협회는 공연단을 보내 UN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를 비롯해 냇 킹 콜(Nat King Cole),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자니 마티스(Johnny Mathis)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스타들의 몸값을 대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그들만으로 전국의 클럽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대안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국의 악단들이 눈에 들어왔다. 

 

8군쇼는 주한 미군사령부의 주요 정책이었다. 처음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위문 공연을 주관하던 이들은 19537, 휴전과 함께 전국 각지의 미군 캠프 내 미군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한다. 1950년대까지 1부 악극, 2부 버라이어티쇼로 구성되어 있던 쇼는 연극이 없어지고 완전 쇼 위주로 바뀌었다. 그로인해 가창, 댄스, 코미디, 연주 등 다양한 형태의 쇼가 펼쳐졌다. 구성은 8군의 지침에 따라  트럭 한 대로 다함께 이동할 수 있는 적정 인원으로 꾸려졌다. 대략 연주인(5~7), 가수(2~3), 무용수(3~5), 그리고 MC, 음향, 조명, 매니저 등 17인 이내다쇼단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보낸 군용 트럭으로 이동했는데 늦은 시간 공연을 마치면 통행 금지로 인해 미군 측이 출연자 전원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초창기에 쇼단은 생필품으로 급료를 받아 단장이 남대문시장 등에서 현금으로 교환, 단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지만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최고의 외화 창구로 부상한다. 1960년도를 기준으로 미8군쇼단의 한 해 총 수입은 1백만 달러를 넘어섰다. 

 

8군쇼단을 체계적으로 운영, 관리하기 위해 1958년 경부터 상공부 등록 허가제로 바뀐다. 당시 쇼 공급회사의 허가 조건은 미8군쇼 등록 단원들로 구성된 쇼단이 다섯 개 이상이어야 했다이로 인해 각자 활동하던 쇼단들이 인력을 합쳤고 그 중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이 화양이다. 이 곳은 바로 미8군쇼 공급 회사의 대표격으로 전성기 때는 5백 여 명의 단원이 소속되어있던 대행 업체다. 화양은 당시 미8군 무대에서 <베니김쇼>를 진행해 인기를 얻은 베니김(김영순)이 지은 회사다. 이어 화양과 쌍벽을 이루는 유니버셜 흥업을 비롯해 고려, 공영, 극동, 동일, 대영, 삼진, 아주 등의 미8군쇼 공급 대행 업체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1960년대 당시 대행 업체 소속 쇼단은 20여 개, 그리고 40여 개의 밴드 팀이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 활동하던 쇼단으로는 베니김이 이끌었던 베니쇼, 에이원쇼(김희갑), 탑드로워쇼(최태원)를 비롯해 뉴스타쇼(김인배), 블랙아이스쇼(박성원), 쇼오브쇼(박선길), 스프링 버라이어티쇼(최태국), 썸머타임쇼(최상용), 웨스턴 주빌리쇼(김동석), 어라운드 더 월드쇼(배상하), 에이 트레인쇼(강철구), NBC(이준영), 20세기쇼(김일광), 토미아리오쇼(송민영), 파피쇼(김안영), 헐리우드쇼(이봉조) 등이 있었다. 이들은 활동 반경에 따라 다른 명칭이 있었는데, 플로어밴드는 쇼단에 속해 전국을 돌며 공연하는 팀이고 하우스밴드는 특정 지역 클럽에 속해 연주하는 팀이다. 오픈밴드는 심사에 통과하지 못해 미군 클럽이 아닌 근처 외곽의 클럽에서 기회를 엿보는 팀이었다. 

 

US 국방성에 보낸 전문가들로 구성된 미8군쇼 심사위원단은 무대에 오를 쇼단에 등급을 매겨 평가했다. 전체 쇼의 흐름과 구성, 그리고 편곡은 물론 영어까지 심사 대상이었다. 결과에 따라 AA, A, B, C로 등급이 매겨졌고 D는 탈락이다. 이 전에 A를 받았더라도 탈락하면 가차 없이 짐을 싸야 했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미8군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개월에서 5개월마다 엄격하게 실시되던 이 분기별 오디션 결과에 따라 지급액 또한 달라졌다. 1회 공연을 기준으로 AA140, A120, B100, C80불 정도였다. 미군 클럽은 계급에 따라 장교들이 출입하는 장교 클럽, 하사관들이 이용하는 하사관 클럽, 일반 병들이 출입할 수 있는 사병 클럽, 그리고 가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 클럽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한 클럽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백인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클럽으로 나뉘어 지기도 했다. 따라서 쇼단은 클럽의 성격이나 분위기에 따라 쇼의 구성, 음악 등을 바꿔가며 적응해야 했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 되어야 했다. 

 

분기마다 실시되는 오디션을 거치면서 뮤지션들은 점차 레퍼토리가 다양해졌고 실력도 나날이 향상되었다. 최신 곡을 소화할수록 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늘 AFKN 방송국<아메리칸 탑 40>에 귀를 기울였고 미군 부대의 주크박스 등을 통해 채보하고 멜로디를 익혔다. AFKN은 US 문화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공개 오디션 현장에서의 구성이나 음악성, 테크닉 등은 서로에게 비교 대상이자 곧 연구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다른 단장이나 쇼단의 눈에 띌 수 있는 캐스팅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엄격한 오디션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미8군쇼 뮤지션들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원천이자 경쟁력이 되었다.

 

물론 뮤지션들은 자신의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인기 있던 US 뮤지션들을 모사해야 했다. 가수라면 인기 가수의 목소리, 창법, 분위기 등이 같아야 했다. 이들은 영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한글로 토를 달아 불렀다. 그렇게 US의 특정 가수를 표방하는 가수들이 등장했다. 가령 최희준냇 킹 콜을, 패티킴패티 페이지(Patti Page), 김상국루이 암스트롱을, 유주용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를 따라했다. 하지만 이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방은 창조를 낳는다. 이들은 모방에서 쌓은 실력을 통해 자기만의 색을 찾고 음반, 방송, 공연 등 우리 대중 음악계 전면에 등장한다. 

  

US 위문협회에 의한 해외 스타들의 내한 공연은 우리나라 가수들의 홍보 창구가 되기도 했다. 내한 공연 때문에 국내에 들어온 한 매니지먼트 회사는 김시스터즈를 라스베이거스로 데려갔고 국내 쇼에 출연하기 위해 내한했던 엘 알버트(Al Albert)는 패티김을 해외 공연에 주선했다. 프랑스 가수 이베뜨 지로(Yvette Giraud)는 내한 공연에서 한명숙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우리말로 부른 뒤 직접 음반으로 발표해 처음으로 우리 음악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30여만 명이 주둔하며 미8군쇼의 흥행을 이끌었던 미군은 1965년 베트남 전쟁으로 5만 여 명으로 감축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급격히 쇠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주(60여개), 동두천(40여개), 부평(30여개) 등 전국적으로 270개가 넘었던 미군 클럽은 점차 활기를 잃고 줄어들었다. 해외로 원정 관광을 떠나는 미군들을 잡기 위해 워커힐을 개관했지만 갈수록 미군들의 발길은 뜸해졌다. 반면 미군이 몰린 베트남에서는 미군을 위한 쇼가 활발해졌다.

 

베트남 전쟁으로 시장의 흐름이 바뀐 것을 안 대행 업소들은 1966년을 기점으로 베트남에 있는 미군들을 겨냥해 사이공, 다낭, 퀴논 등에 지부를 만들고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을 위한 쇼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에 많은 뮤지션들도 대거 베트남으로 원정 쇼를 떠났다. 개런티는 국내에서 보다 평균 세배 이상 많았고 그로 인해 외화가 연 2백만 달러로 증가했다. 정부에선 수출의 날을 맞아 표창까지 수여했다반면 국내에 남아 있는 미8군쇼 출신들은 방송과 음반, 극장쇼, 다운 타운가의 활성화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그리고 하나 둘씩 국내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0210221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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