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현재 국내 가요계는 아이돌 그룹에 의해 점령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가요의 음악적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94년 가요계의 풍경에 주목하는 음악 팬들이 늘고 있다. 1996년 HOT가 데뷔하기 전, 그러니까 본격적인 아이돌 붐이 일어나기 전인 1994년의 한국 가요계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1994년에 발표돼 전설이 된 음악들
팬들이 꼽는 신승훈 최고의 앨범은 단연 1994년 발표된 4집 앨범 <그 후로 오랫동안>이다. 타이틀 곡 그 후로 오랫동안은 물론 사랑느낌, 오랜 이별 뒤에, 어긋난 오해 등 많은 곡들이 큰 사랑을 받았고, 이들 곡은 1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음반 판매도 180만장 이상을 기록하며, 이어지는 5집 앨범까지 신승훈 전성기를 이어갔다.
더 클래식 1집 앨범 <마법의 성>도 1994년에 발매됐다. 마법의 성은 이후에도 많은 가수들에 의해 수 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큰 사랑을 받은 곡이다. 김광진 작사 작곡의 이 노래는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수록될 만큼 이제 시대를 뛰어넘는 명곡의 반열에 올랐다.
서태지와 아이들 음반 중 가장 음악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은 3집 <발해를 꿈꾸며>도 1994년 발표된 앨범이다. 이 앨범은 발해를 꿈꾸며 이외에도 교실이데아, 지킬박사와 하이드 등 사회비판적 성격이 짙은 노래로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발해를 꿈꾸며는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 <음악과생활> 교과서에 90년대를 대표하는 곡으로 수록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015B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 받는 5집 앨범 <Big5>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와 생명에 대한 고찰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폭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은 넥스트 2집의 날아라 병아리, 드라마 OST로 큰 사랑을 받았던 김민교의 마지막 승부, 노래 하나로 16억을 벌었다고 고백한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 이승환 3집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 신성우 3집의 서시, 마로니에의 칵테일사랑, 듀스의 여름 안에서 등 1994년에 발표된 많은 곡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 날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994년에 데뷔해 가요계를 지배한 신인들
1994년 1집 <Roots of Reggae>로 데뷔한 룰라는 앨범을 발매하자마자 타이틀 곡 백 일 째 만남이 대히트를 치면서 데뷔 초부터 자신들의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이후에도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룰라는 순수 댄스 그룹으로서는 흔치 않게 매우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킨 팀으로 평가 받고 있다.
현재 JYP 대표 박진영도 1994년에 신인 가수로 데뷔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가 운영하는 음악웹진 이즘(IZM)의 필자 (현)지운은 1990년대 들어 댄스 음악의 폭풍 속에서 모든 음악이 획일화됐지만 박진영의 등장으로 우리 음악계는 비로소 자기 철학이 몸에 뚜렷이 배인 한 댄스 가수를 얻게 됐다고 그를 평가했다.
김동률과 서동욱의 전람회도 1994년에 첫 앨범을 발표했다. 93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전람회는 1집 앨범의 기억의 습작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60만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이들의 음악은 절제된 가사와 세련된 멜로디로 섬세한 젊은이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 받았다.
1994년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이 바로 토이 1집이다. 1992년 제 4회 ‘유재하 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유희열은 1994년 엔지니어 윤정오와 함께 토이를 결성, 객원 가수를 영입해 다채로운 색깔의 음악 활동을 목표로 앨범을 제작했다. 1집 내 마음 속에는 조동익, 이정식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세션에 참가했고, 조규찬, 장필순 등이 보컬을 맡아 큰 주목을 받았다.
그 밖에도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최신유행을 선도한 투투 1집의 일과 이분의 일, 성진우 1집의 포기하지마, 녹색지대 1집의 사랑을 할거야, 박미경 1집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 쿨의 너이길 원했던 이유 등의 신인 가수 노래들이 모두 1994년에 발표돼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94년 가요계가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94년까지만 해도 싱어 송 라이터들이 대접받는 시대였다. 발해를 꿈꾸며는 서태지가, 그 후로 오랫동안은 신승훈이, 마법의 성은 김광진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한 곡들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들도 마찬가지다. 1994년 데뷔한 박진영, 김동률, 유희열 모두 스스로 작곡한 곡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오늘 날과 같이 대형기획사에 의해 기획된 가수와 노래보다는 스스로 음악성을 갖춘 가수들이 대중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청춘들이 두려움을 모르고 도전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는 그런 젊은이들의 도전을 충분히 받아들일 여력이 있었다. 1994년 데뷔 당시, 박진영(1971년생)은 24세, 유희열(1972년생)은 23세, 김동률(1974년생)은 21세였다. 모두 20대 초반의 나이에 싱어 송 라이터에 도전했고, 또 성공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이는 현재 20대인 1980년대 생의 싱어 송 라이터를 인디신을 제외하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현실과 대비된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부모의 실직과 부도를 간접 경험한 20대 청년들은 자신의 꿈을 도전하는 데 머뭇거렸고, 끝까지 도전한 이들은 자본력과 기획력이 중요해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또 당시에는 mp3가 나오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노래가 좋으면 사람들은 CD와 테이프 등의 형태로 음반을 구입했다. IMF 외환위기 이전이었기에 가게 구매력도 좋았다. 문화적 성숙도도 조금씩 높아졌기 때문에, 당시 사회는 뮤지션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펼치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한 셈이었다.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그룹의 대활약 속에 국내 가요계는 음악적 다양성이 크게 훼손됐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높다. 1990년대 싱어 송 라이터로 성공한 많은 가수들이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아이돌 그룹을 제외하면 새로운 피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 최근 20대 중반 및 30대 초반에서 인디신 음악 팬들이 크게 늘어난 것도 기획되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다양성에 대한 욕구 때문일 것이다.
‘1994’라는 숫자는 풍요로웠던 국내 가요계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으로 남았다. 대형기획사가 탄생하기 전, IMF 외환위기를 경험하기 전, 무언가 도전할만한 환경이 조성됐던 거의 마지막 순간이었기에, 1994년 가요계는 스스로 찬란하게 꽃을 피워 오늘날까지 그 잔향을 남기고 음악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매일경제 / 스타투데이 / 20100126 / 윤성훈 인턴기자]
http://music.daum.net/musicbar/musicbar/detail?menu_id=5&board_id=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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