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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주현미 19610927

by Rainysunshine 2011.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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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19610927

우리대중음악계에 있어서 다른 시대 못지않게 1980년대에도 많은 거성들이 있었다. 최고의 왕관은 언제나 조용필에게로 돌려지지만 후대의 영향력에 있어서만큼은 들국화, 어떤날, 그리고 유재하가 최고의 뮤지션이다. 하지만 트로트분야로 넘어오면, 남녀를 통틀어 주현미가 그 영예를 차지한다. 실상 주현미는 트로트뿐만 아니라 메인스트림에서도 조용필 다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용필의 아성에 도전한 김수철, 이용 등은 정상권에 오르자마자 조기 탈락했고 전영록은 90년대 초반까지 승승장구했지만 전국을 뒤흔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주현미의 인기가 후대에 방송사의 조직적인 트로트 지원에 힘입었다는 이유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녀의 이력을 보면 인기의 유지와 롱런의 힘은 언제나 노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화교 2세다. 아버지는 한의사였지만 해외출장이 잦아 어머니하고만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장녀인 탓에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학교 갈 나이가 되어서는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외할머니 밑에서 컸다. 하지만 그녀는 할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사업실패 등으로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해야 했으며 힘들고 외로운 소녀시대를 보내야 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TV에 선다. MBC의 <이미자 스페셜 아워>란 프로였고 그 방송분량 가운데 모창대회가 있었다. 아버지덕택에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잊을 수 없는 연인’이란 곡으로 그랑프리를 따낸다. 이 방송출연 후 떡잎을 알아 본 오아시스사의 손진석 사장은 ‘바다가 육지라면’을 만든 작곡가 이인권에게 그녀의 조련을 부탁한다. 그리고 꾸준한 연습 끝에 중학생이 된 그녀는 ‘어제와 오늘’이란 곡으로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 가난한 연습생은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부둥켜안고 있었을 뿐 가난함을 탈출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고 동생들을 챙겨야 했다.

그러다 약대를 다니던 1981년의 어느 여름날, 캠퍼스의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약대그룹 인삼뿌리가 강변가요제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 빠져들어 보고 있던 그녀에게 같은 과 선배가 함께 가요제에 출전할 것을 권유하고 노래와 살아왔던 그녀는 바로 팀의 보컬로 참여한다. 그리고 그해 강변가요제에서 ‘이 바다 이 겨울 위에서’라는 곡으로 장려상을 탄다. 하지만 그룹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가정형편상 공부에 매진했던 그녀는 대학 졸업 전에 약사자격증을 따고 약국을 개업해 약사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하지만 음악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작곡가 정종택이 찾아오고 그녀는 노래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잘되지 않던 약국보다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그녀는 그와 함께 여러 음반사를 전전한다. 그러나 당시 ‘촌스러운 목소리와 외모’라는 중평을 받았고 쉽게 기회를 얻진 못했다. 그럼에도 열망은 그녀를 지속적으로 밀어붙였고 마침내 대타의 자리가 그녀에게 행운처럼 주어진다. 조미미와 개런티 문제로 이견을 보이던 오아시스레코드사는 그녀에게 모험을 걸고 하루만에 <주현미의 리듬파티>라는 음반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보통 메들리 음반에 불과했던 이 노래들을 김준규는 똑같이 따로 불러 두 개의 녹음된 것을 하나로 합쳐 듀엣을 조작해냈다. 그렇게 해서 노래는 남녀가 한 소절씩 부르는 것처럼 편집되었고 기존의 메들리 음반이 지닌 단조로움을 어느 정도 만회했다.

이 카세트테이프는 1984년 12월에 <쌍쌍파티>란 이름을 달고 출시되어 시장의 노점상을 비롯한 소매상들을 통해서 하루 평균 물경 1만 여개가 팔려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2집, 3집 등의 연작을 쏟아낸다. 무명의 주현미는 이 음반으로 혜성같이 나타난 트로트의 기린아가 되었으며 당시 노태우 정권의 기조였던 보통 사람들의 시대에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춘 최고의 행운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는 쌍쌍파티 음반을 계속 녹음하면서 자신의 솔로 음반을 작업한다. 후에 남편이 된 임동신이 만든 첫 솔로 곡 ‘비 내리는 영동교’는 스매시 히트를 기록하며 최고의 신인가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 만들었다.

그녀의 촌스러운 외모와 목소리는 약사 출신이라는 엘리트적인 면모에 의해 상쇄되었으며 이전의 비탄조의 정적인 단조리듬, 흐느적거리는 창법에 비해 맑고 청아한 이미지와 발성으로 인해 트로트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이뤄냈다. 덕택에 슬픈 멜로디와 가사임에도 쿨 하게들을 수 있었고 다른 장르와의 교배가 이뤄질 수 있는 여지를 획득했다.

1988년 봄, 결혼을 하고 나서 발표한 ‘신사동 그 사람’은 당시의 강남개발에 이은 연작시리즈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밝은 트로트였다. 밤의 도시적 로맨스를 그린 곡으로 그녀는 방송 3사를 석권했으며 당시만 해도 가장 공정성 있다고 평가받았던 골든디스크상의 대상을 거머쥠으로써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가수의 반열에 오르며 트로트분야로서는 이미자 이후 최고의 경지에 오른다.

인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90년대 초반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짝사랑’, ‘눈물의 부르스’, ‘추억으로 가는 당신’, ‘또 만났네요’, ‘정으로 사는 세상’ 등의 히트곡들이 배출됐으며 계속해서 연말 시상식의 단골 주자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철옹성 같던 그녀의 인기도 90년대 초반에 불어 닥친 댄스폭풍과 트로트분야의 하락세와 더불어 꺾이기 시작한다. 1988년 6월 <동경국제 가요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1993년 본격적으로 일본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일본 무대에 진출하지만 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하지 못하고 국내에서의 활동에 대한 연장으로만 인식해 일본 활동을 조기 마감한다. 이후 임신 등의 계기로 7년간 음반을 발표하지 못하고 활동이 줄자 에이즈 감염설, 사망설 등이 세인들의 관심 속에 퍼져나갔으며 부친의 작고 등으로 그녀는 침잠하게 된다.

1999년 윤복희의 권유로 악극 <외도의 유혹>에 올라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시도한 그녀는 2000년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다시 음악활동을 재개한다. 2003년에는 ‘정말 좋았네’를, 2005년에는 ‘사랑이 무량하오’ 등을 발표했으며 2008년에는 조pd의 ‘사랑한다’에 참여함으로써 음악적으로나 가수로서나 변화를 모색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현재 그녀는 장윤정에게 정상을 물려주고 뒤로 한 발 물러서 있지만 이미자가 그랬던 것처럼 인기의 한계를 넘어선 전설의 경지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20100728 / 20111202 /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2011/12/04 - [1980's/1983] - 쌍쌍파티1 - 주현미 & 김준규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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