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은 서양 고전 음악 연구가들에 의해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와 같은 해에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독일의 작센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바흐가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환경의 혜택을 전폭적으로 받은 데 비해 헨델은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어린 시절을 엄한 감시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서양 고전 음악 세계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양분한 헨델과 바흐는 음악적 스타일이나 활동 면에서 그 어감만큼이나 대조적인 면을 띠고 있다. 헨델은 아무리 많은 성부가 얽혀 있어도 항상 화성이 명쾌하고 솔직하게 호소하는 힘을 갖고 있는 데 비해 바흐의 음악은 수없이 많은 선율이 빈틈없이 짜여 져 정갈함과 정교함이 돋보인다. 헨델은 독일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도 활동한 반면 바흐는 오직 독일에서만 활동하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며 헨델은 생전에 음악계에서 커다란 명성을 거두었지만 바흐는 오랜 시간이 지나 멘델스존에 의해 발굴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바흐는 두 번의 결혼으로 인해 아주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헨델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둘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으면서도 생전에 단 한 번 만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헨델은 음악가들과 만나고 싶고 악기도 맘껏 만지고 싶었지만 집안의 격리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특히 밤마다 몰래 다락방에 올라가 클라비어를 만지작거려야만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어깨너머로 여러 악기를 배우고 익히던 헨델은 너무나 오르간이 만지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자주 가는 궁정에 따라가겠다고 조른다. 그리고는 그 곳의 예배당에 살며시 잠입해 그토록 만져보고 싶었던 오르간 앞에 앉는다. 여기서 그는 그간 몰래 연습하거나 귀동냥으로 배웠던 모든 것들을 즉흥적이고 무아지경으로 토해낸다. 이 꿈을 향한 이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웠던 몸짓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공작에 의해 극적으로 비행할 기회를 얻는다. 그가 헨델의 아버지에게 그의 재능을 언급하며 약간의 여지를 주는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17세였다.
아버지에게서 열린 관용의 틈을 타 그는 성모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차하우(Zachau)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주행을 시작한다. 그는 여기서 다루고 싶었던 모든 악기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작곡가의 음악도 함께 공부함으로써 폭넓은 시각도 갖게 되었다.
1703년 그는 1년 만에 전문적인 바이올린 주자가 되어 함부르크로 간다. 거기서 그는 오페라의 반주자이자 작곡가로도 활동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국대사 아들의 가정교사로도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705년에는 자신의 최초 오페라인 <알미라(Almira)>를 작곡한다.
외국을 왕래하던 그는 1712년부터 영국에 정착하여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 곳에서의 활동으로 앤여왕의 비호를 받게 되는 그는 1726년 아예 영국인으로 귀화해 버린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탈리아계인 보논치니가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싶었던 헨델은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하고 상연하여 그에 못지않은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당시 대세인 보논치니와 그의 지지 세력에 의해 질투를 받게 되며 몇 번에 걸친 파산과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런 후 그는 오페라로 정면 승부하기보다는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로 선회해 <메시아>라는 작품을 만들고 상연한다. 이탈리아의 오라토리오라는 장르를 영국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장대하고 성스럽게 만든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불멸의 음악으로 고전음악계에서 칭송받고 있는 걸작으로, 혁신적인 성공과 지지를 이끌어 내며 그의 전성기를 알린다. 이어 1736년 <알렉산더의 향연>이란 오라토리오로 다시 한 번 연타석 홈런을 때려냄으로써 역사 속에서 모차르트에 의해 살리에르가 거론되듯이 보논치니가 자신을 통해서만 호명되는 이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 대한 일화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평론가 마테존과의 결투가 있다. 헨델은 자신의 초창기 작품 중 <수난곡>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던 마테존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에서 그와 같이 지휘하게 되었다. 마테존이 관현악의 지휘를 맡고 헨델이 쳄발로를 연주하며 지휘를 이어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헨델은 마테존이 지휘 할 차례가 되어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화가 난 마테존은 헨델의 뺨을 후려쳤으며 일어난 헨델은 마테존을 발로 걷어 차버렸다. 헨델의 공격으로 저만치 나가떨어진 마테존은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했고 둘은 오페라가 끝난 뒤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결투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헨델을 찌른 마테존의 칼이 헨델의 금속 단추에 부러지면서 결투는 끝이 났다. 이후 둘은 시의원의 중재로 화해를 했으며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는 그의 결혼에 관한 것이다. 그도 결혼할 뻔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 독일에서는 북스테후데라는 음악가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헨델도 그와 같이 되기를 동경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북스테후데의 연주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그 자리는 알고 보니 북스테후데가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헨델을 부른 것 이였다. 하지만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을 해야만 해서 헨델은 꿈꾸던 자리였지만 그 자리를 마다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이외에도 그가 대식가라는 것, 5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유머 감각이 뛰어나 주위를 늘 재미있게 만든다는 것, 하지만 불같은 성미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 또한 유명하며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1,000 파운드를 기부한 것 등이 전해진다. 현재 그의 초상화로 유명한 그림들은 당시 귀족들이 유행처럼 했던 고풍스런 복장과 우아한 가발로 멋스럽게 치장했던 모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로크 시대는 긴 머리에 꼭 끼는 바지, 단추로 예쁘게 장식한 코트와 망토가 최첨단 패션 이였기 때문이다.
만년에 거의 전설적인 인기를 누린 헨델은 백내장에 걸려 점점 시력이 감퇴하다 실명하게 되어 작곡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74세를 일기로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묻혔다.
20110301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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