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외2011.12.10 10:57



후대에 음악가 집안으로 연구 되는 바흐가는 바흐가 태어날 당시에도 이미 가문에서 배출한 음악가들이 아이제나흐 근방과 도시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현재 세계에서 최고의 음악가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바흐는 이렇듯 음악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태어난다. 비록 집안형편은 넉넉치 않았지만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 형의 집에 기거할 때는 하프시코드와 오르간을 배울 수 있었다. 큰 형 크리스토프 역시 음악가였다. 파헬벨의 제자였던 그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는 바흐와 살면서 매우 엄격하게 지도했지만 그 엄격함이 질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을 여러 곳에서 남긴다. 특히 동생이 보지 못하도록 중요한 악보를 벽장에 숨겨 두곤 했다. 바흐는 형이 보여주지 않는 파헬벨의 악보를 보기 위해 밤마다 벽장에 몰래 숨어 들어가 사보를 하곤했다. 그러다 6개월 동안 이렇게 자신의 악보를 훔쳐본 것을 안 형은 불같이 화를 내며 동생의 뺨을 때리고 동생이 사보해서 가지고 있던 악보를 모두다 불살라 버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큰 형이 오르가니스트 였음에도 바흐가 큰 형에게 오르간을 배울 수 없었던 점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음악에 대한 향학열이 뛰어났던 바흐15세 때 함부르크에 있는 미하엘 교회 합창단의 소속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악보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고 카타리나 교회의 라인켄에게서 오르간을 배우기 위해 40km를 왕복하며 공부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던 중 18세에 바이마르 작센 공의 궁정악사가 되어 형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흐는 곧 실력을 인정받았고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겸 합창장이 되어 작곡을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에서 제일 유명했던 오르가니스트였던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보기 위해 400km를 걸어서 뤼베크란 곳까지 갔던 그는 그만 휴가 일정을 넘겨서 복귀하는 바람에 아른슈타트 교회의 합창장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1707바흐22살의 나이로 사촌누이 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한다. 당시 뮐하우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그는 결혼한 이듬해 바이마르 작센 공의 궁정악사로 초빙되어 10여 년간을 근무하게 된다. 바흐 연구가들은 이 시기에 현존하는 오르간 곡을 대부분 작곡했다하여 이 시대를 '오르간의 시대'라고 부른다. 바흐마리아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가진다. 그 중 엠마누엘 바흐는 소나타 형식의 기초를 확립한 하프시코드 연주자이며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악사로 활약했다. 

그는 첫째 부인 마리아가 죽고 난 뒤 1720년 소프라노 가수인 막달레나 빌켄과 재혼한다. 막달레나바흐 인생에 있어 최고의 공로자로 불린다. 그녀는 바흐의 작곡에 상당한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는 당시에 매일 작곡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후대에 남긴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신을 찬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전에 작품으로 출판된 악보 수가 상당히 적었다. 하지만 막달레나바흐가 작곡하는 모든 곡을 사보하여 정리해 놓았다. 이런 내조 덕택에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바흐가 발견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바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결정적 사건인 1829멘델스존마태수난곡 연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바흐는 아이들의 피아노 연습을 위해 수 많은 곡을 만든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다. 이것은 한 옥타브를 반음씩 쪼개 12개의 반음을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음을 기초로 24개의 조를 구성해 장단조를 망라하고 모두 48곡을 만든 작품집이다. 또한 장남 프리드만를 위해서는 2성 인벤션과 3성 신포니아를 작곡한다. 그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자식들 중에 프리드만, 엠마누엘, 요한 크리스토프, 요한 크리스티안 등이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린다. 

말하는 것보다 더 빨리 작곡할 수 있었다는 바흐는 서양 음악사에 있어 오페라 이외에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양한 양식을 포섭해 무한한 음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대위법의 발전을 이끌어 내었으며 푸카, 토카타 등의 음악 양식, 칸타타 등과 같은 음악 장르를 통해 다성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멘델스존에 의해 재평가된 후 그는 서양 음악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브람스는 신고전주의를 외치며 바흐를 떠올렸고 현대음악의 난해함을 낯설어 한 스트라빈스키'바흐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으며 베토벤바흐를 가리켜 '바흐는 시내(바흐 이름의 뜻)가 아니고 망망대해였다'고 고백했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악장으로 재직하며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생활한 그는 말년에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시력이 나빠져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장님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복용하던 약의 독성으로 급성 허약 증세를 일으켜 1750728일 세상을 떠났다.

 20110214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http://en.wikipedia.org/wiki/Johann_Sebastian_Bach(더 많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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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지운 Rainy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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