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외2011. 11. 23. 00:06

 

서양 음악사의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을 뽑으라면 아마 베토벤(L. V. Beethoven), 바흐(J. S. Bach)와 3파전을 벌이고도 충분한 승산을 가지고 있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3살에 사전적인 훈련 없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었고 5살 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아무런 트레이닝 없이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었던 전설 속의 인물이다. 그의 피아노곡 K.16세 때의 작품이며 교향곡 제1번은 8세 때의 작품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바흐와 같이 음악적으로 뒷받침해주는 환경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궁정악단 부악장까지 오른 경력이 있는 인물로, 인기 있는 바이올린 교본까지 만들었던 이론가였기 때문이다. 또한 네 살 위의 누나 마리아 안나(Maria Anna)도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세 살 때 아버지의 지도를 받는 누나의 가르침을 지켜보던 모차르트는 누나의 공부가 끝난 후 누나가 치던 곡을 그대로 쳐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후에도 아무도 없던 방에서 모차르트는 누나가 치곤하던 전곡을 혼자서 외워서 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모차르트에게도 스케일을 가르치며 연주 여행에도 본격적으로 대동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의 연주 여행을 통해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날린 모차르트14세에는 로마 황제로부터 황금박차 훈장을 받을 정도로 명망을 얻었으며 음악가를 꿈꾸는 모든 어린 소년소녀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연주여행을 끝내고 그는 빈에 정착했다. 흔히 빈 시대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그는 약 10년 동안 연주와 교육에 열중했다. 6시부터 제자들 교육을 시작했으며 연주와 작곡 등으로 하루를 보낸 뒤 3시에야 잠들 수 있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빈에 머물던 그는 파리 연주여행을 하던 22세가 되던 때 작곡가 베버(Karl Maria Von Weber)의 큰 아버지 댁을 방문할 기회를 가진다. 그리고 이 때 그 집의 둘째 딸인 알로지아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베버 가문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연주 여행을 마치고 당장 빈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결국 모차르트알로지아는 아버지의 반대로 헤어지고 만다. 이후 알로지아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빈에서 하숙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모차르트는 그 집을 자주 방문하며 친분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던 중 모차르트에게 마음이 식은 알로지아는 궁정배우와 결혼하고 그녀에 대한 감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모차르트알로지아의 동생인 콘스탄체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결사반대했지만 한 번 실패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소리를 이번엔 귀담아 듣지 않았고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한 것을 안 콘스탄체의 어머니는 사귀는 조건으로 3년 내에 결혼할 것과 그렇지 않으면 그 이후에는 1년에 3백 굴덴씩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밀었고 모차르트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콘스탄체의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그녀는 모차르트에 대한 배려가 없었으며 낭비벽으로 살림을 금방 거덜 냈다. 결국 여섯 아이 중 네 명의 아이를 빨리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다. 한마디로 매사에 불만투성이였던 그녀는 내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지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자가 보기에 둘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모차르트가 그녀로 인해 행복했다면 역사의 평가와는 별개로 운명적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모차르트부부는 그 보다 더 호화롭게 생활했다. 그래서 밀려드는 곡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수행했음에도 항상 돈이 모자랐다. 덕분에 모차르트는 과로에 시달려야 했고 그의 죽음에는 아주 많은 설이 있지만 과로 역시 한 몫 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도 수많은 설이 교차하는 모차르트가 죽던 날은 제자 쥐스마이어가 간호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 때에는 천둥, 번개와 폭풍우로 천지가 뒤덮여 사람들이 그의 장지까지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이와는 정반대의 설도 있다) 그의 관을 운구하던 인부들은 급히 공동묘지의 한 곳에 표시도 하지 않고 내버리듯 묻고 돌아왔고 결국은 아무런 팻말도 없이 방치되어 모차르트의 묘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미망인이 된 콘스탄체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의 저작권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았으며 덴마크의 한 외교관과 재혼했다. 그녀는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곡은 의뢰한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부탁한 Requiem이란 곡이다. 미완성곡으로 그의 죽음을 예기한 곡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후에 모차르트가 만들다 만 것을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했다. 루트비히 폰 쾨헬1862<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전 작품의 연대순 주제 목록>이라는 책을 발간해 모차르트의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후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에는 K라는 그의 이름의 약자가 쓰여 진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RequiemK. 626이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른 편에서 보면 천재로 역사 속에서 남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많이 불행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키가 작고 못생겼으며 자기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겪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와 연주여행을 시작한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그에게 많이 기대게 되었다. 어린 모차르트천재로 선전하며 청중을 끌어 모았으며 모차르트에게 연주의 질 못지않게 기교적인 면을 요구했다. 모차르트는 눈을 묶고 피아노를 연주한다거나 뒤로 앉아 피아노를 연주해야 했다. 어쩌다 모차르트가 몸이 아파 연주회에 나가지 못하면 줄어드는 수입에 대한 걱정으로 아들의 맘을 편치 못하게 했다. 모차르트는 음악적으로 타고난 천재라기 보다는 노력형으로 수많은 선배들의 곡을 카피하며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에는 그에게 표절의 천재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20110312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2016/05/15 - [1980's/1985] - Rock Me Amadeus - Falco / 1985



'대한민국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F.R. David 19470101  (0) 2011.12.18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  (0) 2011.12.10
Eurythmics 1980 - 2005  (0) 2011.12.09
헨델(G. F. Handel) 16850223 - 17590414  (0) 2011.12.01
★ Gary Moore 19520404 - 20110206  (0) 2011.11.25
Wofgang Amadeus Mozart 17560127 - 17911128  (0) 2011.11.23
Posted by 현지운 Rainysunshine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