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90s/1994

The Cross Of Changes - Enigma / 1994

by Rainysunshine 2022. 1. 12.
반응형

처음 Sadeness Pt.1을 만났을 때 그 느낌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섞인 가사라 무슨 말인지 몰랐고, 제목도 잘 못 알고 있었으며 그레고리안 성가에 전혀 조예가 없던 터라 깊게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음악보다는 미셸 크레투(Michael Cretu)나 부인 산드라(Sandra)에 대한 이야기만 친구들과 신변잡기처럼 떠들었다. 시간이 점차 흘러 이 곡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졌을 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Boxing Helena)>란 영화를 보게 되었다. 거기서 이 곡은 아주 야한 장면에 쓰였는데, 아주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재차 매력을 느끼게 되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영화는 데이빗 린치(David Lynch) 감독의 딸로, 현재까지도 할리우드 사상 최연소 여성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기록을 갖고 있는 제니퍼 린치(Jennifer Lynch)의 작품이다. 개봉 당시에는 온갖 혹평이 쏟아졌고 심지어 영화를 보고 화가 나 제니퍼의 얼굴을 때린 아줌마가 있을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개인적으로는 남자 혹은 인간의 소유욕이 갖고 있는 사랑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좋은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니그마(Enigma)는 다시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얼마 후 2집 <The Cross Of Changes>가 발매 되었고 Return To Innocence가 크게 히트 했다. 앨범의 전곡을 들은 것은 정규 앨범을 재포장해 내놓은 스페셜 버전을 통해서였다. 케이스의 디자인을 새롭게 하고 2집 전곡 외에 기존의 곡을 리믹스 해 3곡 더 실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이 CD는 사촌누나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스페셜 버전은 플라스틱 케이스로만 디자인 된 것이 아니라 더블 LP처럼 양쪽으로 펼쳐지는 종이로 만든 케이스에 안쪽의 CD를 끼어 넣는 곳만 플라스틱으로 된 제품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온갖 그림과 음악평론가 하세민의 글이 있는 속지를 살펴보던 나는 맨 뒷장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글귀를 읽게 되었다. 요약해 보면 "신을 찾기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어느 곳이든 신은 없었고 결국 오직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종교에 회의를 갖고 있던 나는 그 글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또한 신의 이름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선주민)을 모두 몰아내고 폭력적으로 땅을 빼앗은 백인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한 Silent Warrior의 내용 역시 시선을 끌었다. 앨범 타이틀인 ’변화를 가져오는 십자가‘는 바로 폭력적으로 종교를 개종시키고 자신들을 선택받은 족속으로 포장해 원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Return To Innocence의 메시지가 가장 와 닿았고 날 행복하게 했다. 가사를 자주 대뇌이다 보니 저절로 외우게 되었고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있어 모토가 되는 곡으로 남게 됐다. 그 중 "운명을 믿고 다른 사람의 말을 신경 쓰지 말고 네 갈 길을 가라(Just believe in destiny / Don't care what people say / Just follow your own way)"는 가사는 지금도 힘을 준다. 살면서 항상 남의 시선에 흔들리는 약한 존재이긴 하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내 삶의 토대는 이 노래가 주는 범위 안에 있고 나에게 있어 <The Cross Of Changes>는 이 한 곡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Return To Innocence에 이어 많이 들었던 곡은 The Dream Of Dolphin이다. 3분이 안 되는 아주 짧은 곡이지만 멜로디가 아주 예쁘고 가사도 심오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드는데, 정말 동물들도 그렇게 생각할지, 돌고래의 꿈은 정말 인간이 되는 것일까에 대한 의심을 갖게 만든다. 뮤직비디오가 환상적이었던 Out From The Deep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곡에서 'Deep'은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기까지 많은 생명체들을 죽였던 시간을 가리킨다. 사랑을 알기 위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수했던 시간들에서 벗어나 인간은 그 빚을 자연에 갚으며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허스키하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호소력 있게 (때론 절규처럼 느껴진다) 외치는 미셸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이 앨범은 전작에서 많은 빚을 지었던 그레고리안 성가에 기대지 않고 다양한 월드 뮤직을 샘플링 함으로써 좀 더 음악적 방향을 넓힌 앨범이다. Return To Innocence는 대만의 전통음악을 샘플링 했으며 앨범의 또 다른 히트곡 Age Of LonelinessThe Eyes Of Truth는 몽고의 음악을 샘플링 했다. 또한 반젤리스(Vangelis), 유투(U2), 제네시스(Genesis) 등의 음악도 조금씩 차용해 전작에 비해 보다 록적인 성향으로 나간 앨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샘플링들은 거의 무단으로 사용된 것들이어서 연속으로 소송을 당했다. Sadeness Pt.1에서는 기존의 성가대가 부른 곡을 그대로 사용해 저작권법에 걸렸고 Return To Innocence에서도 노인 목소리의 주인공인 대만 포크 뮤직 가수 곽영남의 것을 허락 없이 사용했다. 미셸은 익명으로 조용히 해결하고 싶었으나 소송으로 일이 커졌고 결국 두 사건 다 합의금을 통해 법정 밖에서 합의를 해야만 했다.  

<The Cross of Changes>는 걸프전의 승리로 US 주도하의 팍스 아메리카가 맹위를 떨칠 때, 우리나라도 그런 세상을 꿈꾸며 ‘세계화’란 반어법으로 OECD 가입을 꿈꾸고 있을 때, 서구 사상, 서양 종교가 가진 폭력성을 일깨우는 한편 그런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 앨범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인간이 지닌 떨칠 수 없는 근원적인 외로움을 딛고(Age Of Loneliness) 자신의 삶을 긍정하도록 도와준다(Return To Innocence). 이것은 독일 철학자 니체(F. Nietzsche) 이후 집단적 위계질서를 버리고 개인적 차이의 삶을 강조하는 서양 현대철학의 흐름과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 이런 철학은 미셸의 음악이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하는 것, 한 가지 조성만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방향성에 깨달음을 주었고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자신의 음악이 (향후 월드뮤직 부흥의 조짐을 읽게 만든) 독보적인 스타일로 승화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20130122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In every colour there's the light

In every stone sleeps a crystal

Remember the Shaman, when he used to say:

"Man is the dream of the dolphin"

  

[1970s/1979] - Moonlight Flower - Michael Cretu

[1990s/1994] - Return To Innocence - Enigma

 

후원을 하시려면 

Buy Me A Coffee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