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더불어 1970년대를 마감한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향해 다가섰지만 신군부의 집권으로 다시 그 소망은 뒤로 미뤄지고 만다. 대신에 1970년대를 힘겹게 버텨온 우리 국민은 그간 이루어 놓은 인프라와 유가, 달러, 금리가 동시에 낮아지는 3저 현상에 힘입어 유래 없는 경제 호황을 누린다. 도심은 대중화된 자동차로 붐비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차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찾게 있었다.
국가의 경제적 성장으로 국민들은 그간의 정서를 대표했던 한을 밀어내고 신명으로 갈아타기 시작한다. 젊은 세대는 리믹스된 댄스 음악을 들었고 트로트를 소비하던 성인층은 기존의 슬프고 애상조에 젖은 트로트보다는 좀 더 발랄하고 빠른 음악에 반응했다. 이에 힘입어 김연자, 백승태 등이 메들리로 부르던 카세트테이프가 인기를 얻었으며 고속도로에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가 깔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댄스음악보다 더 빠른 음악이 필요했던 밤무대에서는 DJ들이 임의적으로 음악을 섞기 시작했으며 이 덕택에 나이트클럽은 시중에서 들을 수 없는 꼴라주 된 음악을 선보였다. 그로 인해 나이트클럽은 점점 누가 더 신나게 잘 섞어서 스테이지로 사람을 모으는가에 대한 배틀이 붙기 시작했고 이들에 의해 기존의 음악은 재창조되었다. 밤의 황제들은 다운타운으로 모여들었으며 결과적으로 1990년대 댄스 씬의 폭등과 샘플링의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쌍쌍파티>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엄청난 파급력으로 시장의 파이를 크게 키우며 비록 단조로운 비트긴 하지만 기존의 트로트 음악의 방향을 템포가 업 된 쪽으로 기울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메들리 음반의 붐이 조성될 기미가 보이자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조미미를 중심으로 음반을 기획한다. 하지만 그녀와의 이견으로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고 음반사는 대타를 물색했다. 기획사는 정종택의 소개로 주현미를 발굴하지만 그녀가 하루 만에 녹음한 <리듬파티>의 밋밋함을 고심한다. 음반사의 문예 부장이던 박성규와 가수 김준규는 남자의 목소리를 넣어 투톱 시스템으로 가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며 다시 전곡을 따로 녹음한 김준규는 음원을 가위로 편집해 두 사람이 동시에 녹음한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그리고 원래 한 소절씩 노래한 것처럼 만들었다.
이 음반은 노점상을 비롯한 소매상에서 하루 1만 여개가 팔려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하며 차에서는 물론이고 이발소, 음식점 등을 비롯한 소점상인들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약사가수 주현미는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고 트로트메들리의 열풍은 듀엣으로 번졌다. 주현미는 잘 안 되던 약국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솔로 앨범을 준비한다. 그러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남편을 만나고 그녀의 남편은 <쌍쌍파티2>에 수록되었던 눈물을 감추고를 일부 차용한 비 내리는 영동교를 그녀에게 바친다. 주현미는 이 곡으로 벼락같이 정상에 올라 신사동 그 사람과 짝사랑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메인스트림의 패자로 군림한다.
20100727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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