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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s/2012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 정태춘 박은옥 / 2012

by Rainysunshine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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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시인의 노래  

1분가량 화성 없는 기타소리와 발걸음 소리, 기차소리가 지나면 그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나만의 생각일까? 이 친숙하고 반가운 목소리는 전에 비해 가라앉아 있다. 물론 그의 멜로디는 귀에 쉽게 빨려 들어오고 설득력 있는 음성은 여전히 가슴을 파고든다. 그렇지만 10여 년이 지나도록 아직 첫 차는 오지 않은 것일까? 휘몰아치던 그 열정은 다큐멘터리 내레이터처럼 관조적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마치 신세계가 도래한 것처럼 떠들며 외면하고 떠난 빈 들을, 그는 기차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서울 역 이씨처럼, 혹은 속절없이 지나가는 그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어 속 태우는 섬진강 박시인처럼 '눈먼 사내'가 되어 외롭게 지내온 것일까?  

어쩔 수 없는 이별에 통곡하는 가슴이 첫인상으로 다가온다. 정태춘은 "더는 음악으로 소통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은둔을 시작했다. 마치 고갱을 잃고 귀를 잘라낸 고흐처럼 그는 음악을 인생에서 도려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눈먼 사내'의 심정으로 아랑곳하지 않고 "떠나가지마"라고 애원했을 것도 같고 "떠날 것은 떠나더라"고 한탄하며 애먼 봄과 꽃비를 탓했을 것도 같다. 그래서 "폐허 위에 서 있는" 서울 역 이씨는 그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그래서인지 한편은 그리움으로 묶인다. 우리는 이 노래들의 행간을 통해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종점 역"처럼 기다리다 "연분홍 봄볕에도 가슴이 시리고","그리워 뒤척이던 밤, 등불"을 끄지 못하고 "그리움에 병들었을" 화자의 심정을 읽는다. 그리움의 대상이며 메타포이자 일종의 암시로 곧잘 등장하는 '물'은 이상향(또는 이상향을 향해 노력하던 시기)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음악으로 소통하던 과거일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노래 그 자체가 아닐까. 정태춘 박은옥은 ('강'으로 상징되는)그것이 그리웠다는 데 동의하니 말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불법음반을 내며 심의에 저항하던 특유의 뚝심이 되살아난다. 여전히 이들에게는 홀로 고군분투하며 온 몸으로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독립군의 기상이 느껴진다. 어느덧 우리는 "붉은 산호들 춤추는 심해"를 찾는 이 "꿈꾸는 고래"의 샹그릴라를 향해 가는 노정에 동화된다. 거기는 "모든 시계가 잠들어도 아직도 일렁이는 바다"이고 가을이면 "계곡 물엔 단풍잎들이 헤엄치고 은어떼들 산으로 오르는" 곳이며 "국적도 없이 비자도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동진, 날자, 오리배…로 이어지는 서사시의 연작에서 그곳은 어쩌면 존 레넌(John Lennon)의 Imagine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이 합쳐진 곳이 아닐까 가늠해 본다.  

정태춘은 문민정부 이후 쇠퇴한 운동권가요를 저항가요로 격상시켰으며 노랫말과 가락을 통해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정서를 꾸준히 탐험해왔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항상 숙제처럼 따라다니는 ‘국악의 대중화’처럼 "일만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수도승"의 길이었을 것이다. 잠시 쉰 그는 이제 다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탄다. 끝내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첫 음반부터 지금까지 쭉 들어온 팬이라면 그의 호소에 주억거렸을 것이고 당신도 그 버스에 올라 탈 것이다. 그가 아무리 개인적인 정서를 노래했더라도 그것은 시대의 아픔과 함께 가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싸움은 한창이고 그 싸움이 끝나고 모두가 쉬는 밤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이 시인과 함께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P.S. 정태춘이 로직을 사용해 편곡했다는 홍보문구를 보고 그가 시퀀싱 소프트웨어에 빠져 국악과 접목한 아트록 음반 혹은 영화음악이나 후배들의 음원을 프로듀싱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천재지만 저항가요에 발을 담그고 있어서 일류 작곡가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빨리 KBS 2TV <불후의 명곡>에도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한다.  - 정태춘은 2019년 <불후의 명곡 - 정태춘, 박은옥>편에 출연했다. 

 

20120214 백비트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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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일까, 겨울 비 내리는데
썰물처럼 가로등 불빛 꺼지고
아무도 떠나가지 않을 정류장
시내 버스 모두 돌아오고

그 얼마나 먼 곳으로 헤매었니
이제 여기 변두리 잠시 닻을 내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을 종점 역
그리움에 병 들었을 너 

 

[2010s/2012] - 행복이 보낸 편지 - 김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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