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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39

들국화 전인권(1954년 9월 4일 : Vocal) 최성원(1955년 2월 9일 : Bass) 주찬권(1955년 3월 18일 : Drum) 조덕환(Guitar) 허성욱(1962년 ∼1997 11월 20일 : Keyboard) 최구희(Guitar) 손진태(Guitar) 신중현, 김민기, 조용필, 들국화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록이라는 정체성을 아우라로 휘감아 역사적으로 생경한 문법을 만들어냈다는 데에 있다. 그 중 들국화라는 그룹이 갖는 우리 음악계에서의 위치는 억압의 사슬을 지나던 시절 터트린 젊은이들의 세계를 대변한 1집을 통해 밴드라는 록 음악이 가지는 뼈대를 건립하고 후에 작가르네상스라 불리는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물고를 텄다는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백하게 우리.. 2012. 7. 8.
서태지와 아이들 1992 서태지 19720221, 이주노 19670210, 양현석 19691202 그룹 시나위를 나온 서태지는 시퀀서로 곡 작업을 시작했다. 지독히도 기나긴 시간이 걸린 난 알아요의 데모는 놀랍게도 록 밴드의 주자가 가진 마인드와는 한참 떨어져 보이는 랩송이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MC 해머(Hammer),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등의 흑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말로 된 랩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힙합에 대한 정식코스를 밟기 위해서 양현석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으며(비록 춤 선생의 군 입대로 금방 깨졌지만), 데모 테이프가 완성 된 뒤에는 양현석과 그와 춤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던 댄스 황제 이주노를 맞아들여 댄스 팀을 만들었다. 이들의 데.. 2012. 3. 25.
어떤날 조동익 19600306 이병우 19650122 1980년대 주류의 물살을 탄탄하게 견제해 주던 동아기획의 절정은 들국화였지만, 이 꽃밭을 오래 가꾸며 향기가 떠나지 않도록 한 것은 바로 그룹 어떤날 이였다. 후에 동아 기획에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던 친구 최진영의 소개로, 두 스타일리스트, 이병우와 조동익은 첫 악수를 나눈다. 이 만남은 글자 그대로 대중음악의 지형도를 감수성만으로 쏘아 올린 역사적인 순간이다. 조동익은 그의 형 조동진의 2집에 어떤날이라는 곡을 주며 음악계에 첫 발을 디디게 된다. 조동진이 칭찬했다는 이 곡은 곧 이들의 팀 이름이 됐으며 허영자가 쓴 가사처럼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음악으로 전설을 만들어 간다. 이들은 1985년 최성원이 기획한 에 너무 아쉬워.. 2012. 3. 3.
임종환 19640417 - 20100523 싱어송라이터 장덕의 추모앨범에서 내가 만나는 하나님께라는 곡으로 음악계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한 임종환은 1980년대에 인생별곡으로 인기를 모았던 통기타 가수 이용식의 지도아래 난 널 믿어란 곡을 발표하면서 음악계에 본격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와 같은 느낌의 이 곡으로 자주 변진섭으로 오해 받았던 그는 1집에서 기다림은 기다림으로나 내가 아닐 꺼야, 유리창에 비친 슬픔과 같은 곡으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레게음악을 처음으로 연구하고 도입했던 벗님들 출신의 김준기가 프로듀서로 나선 그의 두 번째 음반은 온통 레게의 숨결이 느껴지는 음반이다. 김건모의 핑계를 시작으로 마로니에, 투투, 룰라, 닥터레게, 김흥국 등으로 인해 90년대에 랩과 함께 새로운 문법의 하나로 떠오.. 2012. 2. 7.
장덕 19620421 ∼19900204 “잊지 말아요/ 우리의 사랑을/ 잊지 말아요/ 우리의 기억들을/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한창 성장기에 있던 약관의 한 뮤지션은 이와 같이 이별의 가사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모든 음악인의 죽음은, 팬들에게 공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기 마련이지만 나이 어린 스타일수록 그 황당함은 배가된다. 우리 음악계의 지각변동을 바로 목전에 둔 1990년,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한 장덕은 '80년대 추상적이고 모호했던 가사를 가지고 있던 음악들의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당시 10대들이 품고 있던 생각을 표출할 수 있었던, 신세대적 감각이 출중했던 프로듀서 중의 한 명 이였다. 그녀의 음악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한 결 같이 어둡게 이별의 순간들을 포착하고.. 2012. 2. 6.
현철 19450617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트로트란 장르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3번에 걸쳐 융기한다. 그 첫 번째는 당시 주류였던 창가, 신민요를 제치고 서민의 품으로 들어온 일제강점기 후반의 일이며 두 번째는 이미자를 필두로 남진과 나훈아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60년대,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주현미와 소위 트로트 4인방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서구대중음악보다 먼저 입장해 장구한 시간을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트로트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얻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주도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주장 때문이다. 거기에 1980년대 후반의 인기는 관과 방송사가 연합한 결과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 거세게 일어난 트로트의 봉기는 정.. 2012. 1. 4.
장혜리 19630116 장혜리(장정희) 19630116 장혜리는 19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에 활동하며 5장의 앨범을 발표했음에도 전반적으로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라는 한 곡만이 히트한 원 히트 원더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가수다. 공무원가족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집안 분위기에 힘입어 고교 졸업 후 공업진흥청에서 비서로 근무했다. 그러다 여러 차례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반한 직장상사가, 알고 지내던 작곡가 길옥윤에게 소개함으로써 가수의 길로 방향을 전환한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길옥윤을 찾아가 사랑의 미로와 그때 그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18개월간의 조련 끝에 드디어 1986년 오늘밤에 만나요라는 트로트 분위기의 댄스곡으로 데뷔를 한다. 길옥윤 작품집이라 볼 수 있는 .. 2011. 12. 27.
조영욱 1963 우리의 영화음악은 각각의 연대에 히트작이라 불릴만한 것을 적어도 한 작품씩 배출했다. 1960년대에는 작곡가 백영호가 만들고 이미자가 불러 당시 축음기가 있는 사람은 모두 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 1970년대에는 이장희가 만들고 불러 술집 아가씨와의 로맨스 붐을 일으킨 , 1980년대에는 강인원이 만들고 권인하, 김현식 등과 불러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던 , 그리고 1990년대에는 아마도 최초의 스코어 성공작이라 평가할 수 있는 김수철의 와 음악감독 조영욱이 곡을 골라 세팅했던 영화 의 O.S.T.가 그것들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음반판매량의 전반적인 저조와 더불어 판매고가 기존보다는 높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조영욱이 음악을 담당한 에서 심현정이 작곡한 미도의 테마가 히트되었고 2000년대의 대표적인.. 2011. 12. 23.
고복수 19111119 - 19720210 어린 시절 유성기를 너무 좋아해 나오는 곡마다 따라 불렀던 고복수는 경상남도 울산의 기계국수집을 하던 잡화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해 이미 교회에서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었고 보통학교에서는 언제나 학예회 마다 뽑혀나가 창가를 불렀다. 23살 때 조선일보가 후원하고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했던 콩쿠르 부산지역예선에서 1등을 차지한 그는 부모 몰래 금고에서 60원을 빼낸 뒤 부푼 가수의 꿈을 안고 곧장 서울행 밤 열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서울 본선대회에서 지정곡인 두견새 우는 밤(비견)과 자유곡 처량한 밤(낙화암)을 불러 3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여자 입상자들에게 빼앗겨 음반 발매가 늦어졌다가 당선자 발표 음악대회에서 OK 레코드 사장 이철의 이목을 끌어 이후 .. 201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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