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느 여자 후배가 “오빠 이승환 잘 생기지 않았어요? 노래도 엄청 좋아요”라며 들고 와 보여준 카세트테이프 때문이었다. 고개 숙인 모습이 지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남의 외모에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여자 친구가 그 음반을 사들고 왔다(흑백사진은 좀 난감했다). 그래서 듣게 되었고 다행히도 앨범은 맘에 드는 곡을 품고 있었다. 바로 오태호가 만든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였다. 멜로디도 좋았지만 가사가 특히 와 닿았다. 그녀와 난 장거리 연애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와 잘되리라 생각한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2번째 앨범에서는 어수은의 너를 향한 마음과 회상이 지나간 오후가 꽂혔다. 물론 처음에는 오태호 작곡, 조동익 편곡의 환상적인 콤비가 만들어낸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의 “사랑은 그렇게 이뤄진 듯해도 이제와 남는 건 날 기다린 이별뿐”이란 가사와 “난 기다림을 믿는 대신 무뎌짐을 바라겠지”가 심금을 울렸지만.
이승환은 오태호와 <이오공감>이라는 앨범을 내놓았다. 트랙은 이승환이 더 많았지만 난 오태호의 이별에 대한 정조로 뒤덮인 뒷장을 훨씬 더 좋아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의 한사람을 위한 마음 한 곡만으로도 앞장을 압도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건 나 2의 실험성만큼은 강하게 와 닿았다. 이 힘이 4집의 너의 나라와 6집의 나의 영웅과 같은 곡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뒤이은 <My Story>의 내게도 개인적인 추억과 함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정말 “돌아갈 수 없는 날이 그림처럼 스쳐가던” 날들이었다.
<Cycle>은 전작에 비해 마냥 편했다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가족과 사자왕을 좋아했지만 점점 애원과 붉은 낙타에 끌렸고 <The War In Life>에서는 초반에 세 가지 소원을 노래방 애창곡으로 여길 정도로 좋아했지만 뒤에는 Rumour와 Let It All Out을 흥얼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앨범에는 이승환 최고의 곡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나의 영웅이 도사리고 있다. 이 곡에 대한 놀라움은 아직도 유효하다. 내게도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 서사적 분위기는 그대가 그대를에서도 이어진다. 정규 앨범은 아니지만 <Long Live Dream Factory>의 그대가 그대를은 빼기 힘들다. 드라마타이즈의 뮤직비디오와 너무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고 지금은 인기가 좀 시들한 것 같지만 당시 김정화의 모습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아! <Egg>는 무려 24곡이나 된다. 이 앨범도 당시 웹진에 글을 쓰기 위해 많이 듣긴 했지만 다시 들어보니 확실히 잘못, Christmas Wishes, 사랑하나요 등이 있는 써니 사이드 업의 곡들이 훨씬 친숙하다. 하지만 왜와 위험한 낙원을 더 좋아했던 느낌은 여전하다. <Karma>에서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려는 물어 본다를 빼놓을 수 없다. 나 역시 그런 성찰을 통해 재도약을 꿈꾸던 시기였다. <Hwantastic>에서는 건전화합가요와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제치고 손에 손을 들어주고 싶고 <Dreamizer>는 거의 다 좋지만 Dear Son의 곡 구성이 맘에 든다.
확실히 해 두자. 여기의 리스트는 지금 이순간의 리스트일 뿐. 그는 계속해서 노래를 발표할 것이고 나는 계속해서 업데이트할 것이다. 어떤 곡은 재발견될 것이며 어떤 곡은 과대포장 되었던 평가에 상응하는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모든 것은 다시 뒤죽박죽되겠지.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의 역사 속에 들어와 있는 이승환의 곡들은 어떤 것들인가?
20120511 다음뮤직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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