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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s/2000

미인 - 노영심 / 2000

by Rainysunshine 2016.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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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과 맞서다 긴급조치 9호라는 훈장을 따낸 여균동 감독에게는 데뷔작 <세상 밖으로>나 단편 <외투>, <내 컴퓨터>와 같은 사회성 있는 작품들이 일견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그는 청룡영화제 신인 남자 배우상을 안겨준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이후 모든 관심을 성()으로 돌렸다. 이후의 작품인 <?>이나 <죽이는 이야기>가 그렇고 배우로 참여했던 <주노명 베이커리>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사정에 대해 그는 "막강한 국가 권력 앞에서 모성이 사라진 시절을 살아온 모래시계 세대의 저항"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홈페이지 서버가 다운되는 사태를 벌이기도 했던 화려한 누드의 영화 <미인>은 지금껏 그려왔던 단면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주제의식도 들어 있지 않으며, 개연성 없는 연인의 나신이 과거의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예술적 성취라는 면에 있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나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x)>을 읽고 기획을 시작했다는 여균동, 감독 자신이 직접 쓴 중편 <>이라는 소설을 각색한 의도대로 육체에 탐닉하며 절제와 세련된 영상미로 영상을 포장했다. 하지만 남녀주인공의 의사소통은 단절되어 있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섹스로 많은 시간을 보내도 둘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니까 오히려 육체미의 탐구는 충족되지 않는 공허한 관념을 잘 설명해줄 뿐이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대로 가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저런 여자와 섹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도 결코 저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 절실하고 처절한 사랑 속에서 끌어내지 못한 공감은 무엇일까.

 

"그래도 둘은 사랑하고 있어"라고 외치는 듯한 공허한 울림은 미백의 영상 속에 전달되지 않는 주인공들의 어투에서 고스란히 들어 난다. 후시녹음의 더빙은 애교로 넘어가자. 기자라는 남자주인공의 독백은 마치 남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남자의 목소리는 모두 후시녹음으로 하고 여자의 목소리만 동시로 가던가, 아니면 내레이터를 썼어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언어는 분명 여균동의 것이지만,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주전자 끓는 씬 에서 여자(정선경)에게 느낌을 말하던 그 것과는 아주 다르다. 남자 주인공은 여균동이 원하는 상으로 완벽하게 치환되지 못했다.

 

과연 창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쁜 방에서 정기적으로 글을 쓰며 집에서 책만 읽는 듯이 보이는 한 중산층 남자의 일상에 뛰어든 여자와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갈 곳 없는 연인들이 드나드는 여관방에서의 하룻밤보다 아름다울까? 이 것은 영상미의 조작 아닌가? 이 미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곤 사랑에 대한 갈증보다는 경제적 박탈감 내지는 늘씬한 몸매 아닐까? 이런 집에서 이런 몸으로 사랑하니 개연성 없어도 멋있지?와 같은. 

 

그렇게 느낀 이 영화는 노영심의 피아노에 의해 부분적으로 구제 받는다. 지극히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은 두 남녀의 손길과 제스처를 대사보다도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화면 안의 낯선 풍경, 외롭고 불안한 이미지들에도 맑은 톤으로 어둡고도 스산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너무 행복하면 불안하듯이 너무 맑아도 슬프다. 안타깝지만 영화는 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기 작곡가이자 화려한 게스트가 있는 이야기콘서트로 엔터테이너 혹은 진행자의 면모만을 보여주던 그녀는 어느덧 조지 윈스턴(George Winston)이나 유키 구라모토(Yuhki Kuramoto)를 비롯한 뉴에이지 계열의 선배들이 몇 개의 단조로운 음만으로 보여주었던 계절의 변화무쌍한 풍경에 도전하는 경지 가까이 이른 것이다.

 

굳이 말로 얘기하지 않아도, 노래의 가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녀가 메마른 사랑을 표현하는 변주에 풍요로움을 느낀다. 그 빈 공간이 시나리오의 지문을 대신하고 낯선 주인공들이 서로 발견해 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포착한다. 그것은 건반화성의 달인이 보여주는 즉흥적 흐름이 드디어 봉우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는 예증일지도 모르겠다.

 

노영심은 2004년 필름 2.0과의 인터뷰에서 감성적으로 맞는 영화’를 고른다는 기준으로 보자면 <미인>은 의외였다는 질문에 "나도 의외였어요. (웃음) 균동이 오빠가 시나리오 작업할 때 이런저런 얘기를 같이 나누다가 그래, 음악은 네가 해라’라고 해서 하게 된 거예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음악을 피아노로 다해보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죠. 피아노만으로 연주한 영화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늘 갖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음악이 잘 어울렸어요. 벗은 몸하고요(웃음)"라고 말했다.  

   

20010613 / 20160109 이즘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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