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는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록 그룹 무한궤도가 주병선의 고인돌을 물리치고 대상을 받은 곡이다. 1991년 발표된 신해철의 두 번째 솔로앨범 <Myself>에 재녹음된 버전이, 2006년 넥스트(N.EX.T)의 앨범 <Regame?>에서 60인조 체코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버전이 실렸다. 신해철은 이 버전을 '완전판'이라고 표현했다. 2003년 문희준이 리메이크 했고 싸이(Psy)의 공연 애창곡이다. SBS에서 방영된 2014년 한국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 넥센과 LG의 경기를 비롯해 각종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가로 많이 사용되는 곡이고 신해철 사후에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로도 많은 프로그램에서 사용되었다.
신해철은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비화와 이 곡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인터넷 칼럼과 인터뷰 저서인 <쾌변독설>, tvN <택시>, 사운드 앤 미디어 인터뷰, MBC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 등을 통해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는 파편화되어 있는 내용들을 하나로 꿰기 위해 개인적인 느낌이나 경험 등을 배제하고 중복되거나 빼도 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없애고 인터뷰 방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게 된 계기에 대해
“여러 프로그레시브 밴드들과 팝이 겹치는 영역에서 우리가 활동할 공간은 오버에도 언더에도 없었어요. 레코드사로부터는 언더밴드로, 언더밴드들에게는 부르주아 학생밴드로, 대학 써클 밴드들에게는 잡탕 연합 서클 취급을 받았죠. 당시는 발라드가 국내를 완전 평정 할 때여서, 앨범 한 장을 사면 발라드 9곡에 구색용 빠른 노래 한곡이 들어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렇게 가던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영어로 메탈 판을 하나 만들고 매우 비겁하게 록발라드를 빙자한 완전가요를 하나 싣던 가 해야 했어요. 전자냐 후자냐 둘 중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선택에 따라 오 만장쯤 팔던 가 삼천 장 팔고 만족하던 가하는 팔자가 정해지는 거였죠. 판 팔리는 장수가 의미하는 게 금전적인 수입이 아니라, 활동영역이라고 볼 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러다 분식집에서 한 놈이 ‘야! 우리 대학가요제나 나가자’하고 말 했는데 처음에는 모두 비웃는 투로 크게 웃었어요. 당연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린 우리가 그냥 언더 신에 있는 수백 개의 밴드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지 스스로를 대학생 밴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전 멤버가 대학생 이였던 거예요. 물론 언더 신을 버리고 우리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빌미로 대학가요제라는 권모술수로 상황을 타개하기가 참으로 쪽팔리긴 했지만요. 그런데 어떡하겠어요. 살 놈은 살아야지. 우린 나가자는 쪽과 나가지 말자는 쪽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거쳤고 그런 와중에 베이스를 맡았던 양두현이 유학을 가고 대신 조형곤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결국엔 접수 마감 날 원서를 냈죠. 웃긴 건 절대 그런 웃기는 짜장 행사에 참가 할 수 없다던 강경파들도 마감 당일 날엔 ‘두 시간 늦었는데 원서 못 내는 거 아냐? 어떡하지?’ 했다는 거예요.”
곡의 의도에 대해
“사실은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만든 곡이예요. 이전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만든 아기천사라는 팀이 강변가요제에 나갔는데 제가 그 팀의 긴급 요청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우린 라디오 중계에 나가는 본선 24팀 안에는 들었지만 TV 중계에 나가는 결선 12팀에는 떨어졌어요.당시 떨어진 이유를 수긍하기가 어려웠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결선 팀이 내정 되었었다더라’는 비리설이 돌았죠.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가요제를 분석해 보았는데, 일단 대학 가요제나 강변 가요제는 방송국의 자체 축제의 경향이 강해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던 밴드는 입상권보다는 행사 구색용으로 쿵짝을 해줘야 된다는 생각을 했고요 ‘심사위원은 TV를 보면서 채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관객과 같이 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의 반응을 잡아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는 지름길이며, 가장 정당한 방법이다. 따라서 '여러 번 들어보니 좋은 곡' 따위는 먹힐 리가 없다. 한방에 보내야 한다’라고 생각했죠.”
전략적이었다는 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대학가요제는 제가 프로듀서라는 개념으로 볼 때 쇼 비즈니스적인 면하고 음악적인 면 두 가지를 완벽히 계산해서 만들었던 첫 케이스예요. 그 후 무한궤도 앨범은 굉장히 순수하게 만든 앨범이었고요. 필요에 따라서 사람이 몰리면 발악을 하기 마련인데요. 솔로 1집 때는 어떻게든 전문 직업인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다가 히트를 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감정이 개입되었던 것이 솔로 1집하고 그대에게예요. 그대에게를 저의 데뷔곡이니까 상당히 순수하게 봐주시는 분이 많은 데요. 음악 자체를 굉장히 순수한 마음으로 만들기는 했어요. 그러나 분명히 계산은 있었어요. 그게 어떤 거냐면 대학가요제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의 뒷거래가 있다거나 백이 작용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웃기다고 생각했고 제가 진짜 느낀 건 1회성의 축제라는 대학가요제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하고 축제로서 관객들을 불러 모은 그 현장에서 그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면 분명히 우리 실력을 상회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첫째는 관객들을 흡수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전에 강변가요제에 출전한 기억이 있었는데 아주 뼈저린 기억이었어요. 음악적으로 우리는 분명히 본선 진출을 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떨어졌단 말예요. 이 축제로서 행사에서 분위기를 띄워주고 흥겹게 해주는 밴드가 해야 될 역할을 우린 하지 못한 거예요. 우린 발라드를 불렀으니까요. 그래서 이 행사를 만든 사람들이 원하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에 우리가 부흥해 주는 것이 쇼 비즈니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4분의 제한 시간 안에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그 안에서 확실히 보여줄 것을 보여주고 반응을 얻어야 되는데, 필요한 것은 단순한 8비트의 곡으로, 관객이 처음 듣지만 빨리 흡수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요란한 인트로를 만들어서 여러 참가자들 중에서 튀어서 분위기를 빨리 장악을 하고 변화가 있고 웅장한 노래를 만들어서 관객들 반응을 유도한 다음에 쇼적인 발악을 할 수 있는데 해 보는 거였어요. 그래서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할지랄 다 하고 상 주나 안 주나 보자라는 식으로 만들었죠. 단순한 팝풍의 8비트가 주력인 4분 안에서 급격히 변화하는 노래를 의도적으로 작곡한 거예요. 그게 제가 처음으로 습작이 아니라 인트로에서 아웃트로까지 완성을 한 첫 노래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 당시 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이 되실 거예요. 그래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있었어요. 그건 기타 록이 아니고 헤비한 음악이 아니면 왕따를 당하는 당시의 록 밴드 풍조에서 아시아(Asia)처럼 키보드가 주도하는, 트윈 키보드로 ‘키보드가 많이 나오는 이런 록 음악도 있다’는 것과 대학가 서클에서조차 헤비메탈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프로그레시브나 신디사이저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적어도 그것 만큼은 우리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목표였어요. 전략적인 관점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서 창피하기 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하면서 한손에는 악보를, 한 손에는 계산기를 들고 있는 것은 의무지 창피한 사항이 아니고 계산기만 들고 음악 한다고 설치는 사람이 미운 모습을 보이는 거지 네 한 손에 악보가 들려 있다면 괜찮다는 말을 이제 처음 길을 여는 후배들에게 해 주고 싶어요.”
작곡 과정에 대해
“어떤 노래든 1절정도 들어보면 답이 나와요. 2절은 어차피 1절의 반복이니까. 그렇다 해도 예의상 2절까지는 반복해야 했어요. 그래서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나 들어 왔어요, 저 끝났어요’ 식으로 쓰는 게 아니라, 곡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독립 곡으로 간주하고 화려하게 가는 걸로 택했어요. 시작 하는 순간부터 튀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인트로는 그 당시 화성악 공부하면서 가장 간단한, ‘이런 진행을 사용하면 돈이 벌린다, 이런 코드를 쓰면 인간의 귀라면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들린다’는 'money progression'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코드와 리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패턴으로 가고 단지 편곡을 국내 밴드 족보나 가요 족보에 전혀 없는 팝록 밴드 풍으로 복잡하게 벌린다는 구상을 했죠.
당시 음악을 심하게 반대하신 아버지의 검열을 피해서 기타를 뚱땅 거려야 했던 나는 심야 작곡 세트를 갖고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기타 줄 사이에 끼어 넣는 스폰지와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 이예요. 그걸 갖고 이불을 뒤집어 쓴 후, 이불 속에서 헉헉 숨을 물아 쉬며 곡을 썼죠. 잠시 작업 하다 보면 이불 안에 습기가 차고, 머리가 어지러워 네 마디 이상을 연속으로 작업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이미 전략이 짜여 있었기에 인트로서부터 후주까지 10분쯤 걸려서 다 만들었어요.”
당시 사용한 악기와 무대에 대해
“조형곤이 펜더 재즈베이스, 내가 워시번 G-5V 기타를 갖고 있었고 키보드는 조현문이 친척집에 있던 것을 장기 임대해 온 주노 60과 디엑스 7, 김재홍은 중1때부터 대학 들어가면 사달라고 졸랐던 롤랜드 D50, 나는 아카이 X7000을 갖고 있었어요. 당시 나는 중고생들 과외로 수입을 얻고 있었는데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키보드를 살 돈에는 턱 없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10남매나 되는 친척 중 유일하게 한량 기질이 있는 작은 아버지에게 고민 상담 차 찾아 갔는데 의외로 거금인 100만원을 마련해 주셔서 키보드를 갖게 되었죠. 그렇게 해서 우린 무려 4대의 키보드를 갖고 무대에 올라갔어요. 물론 당일 날 출전한 다른 밴드들도 우리와 동급의 악기를 사용했지만 그건 당일 날 악기사에서 대여한 것들이었고 우린 자기 소유의 키보드가 있었기 때문에 활용도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났죠. 모든 키보드는 스플리트 모드로 왼손, 오른손이 다른 소리를 내도록 세팅되어 있었고 내 키보드에서는 동시에 5개의 다른 소리를 지원하도록 설정해 놓았어요. 그래서 우승 후에 무한궤도는 억대의 장비를 쓴다는 소리가 돌았죠.
하지만 무대는 그리 좋지 않았어요. 당시 무대 배치는 체육관 센터에 거대한 메인 스테이지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서 솔로 가수들이 고목나무에 붙은 모기 폼으로 노래를 하고, 밴드 무대는 메인의 20분의 1사이즈로 한 쪽에 찌그러져 있었는데 드럼 세트와 앰프 사이에서 설 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어요. 게다가, 솔로들의 마이크는 완전 고급품인데 비해 밴드의 마이크는 3만 원짜리 오디오 테크니카 였어요. 한술 더 떠, 무대 위에 모니터 시스템이 용량이 너무 적어 우리가 연주하는 소리보다 체육관 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소리가 더 컸죠.
우리는 16번을 배정받았는데 15번이 노래할 때 올라 갈 준비를 시작했어요. 그 때 악기들의 전원을 넣었는데 키보드에서 ‘bad data disk’ 사인이 떴어요. 전에도 몇 번 겪은 적이 있는 일이었어요. 내 키보드는 로딩 시간이 너무 길어 X700의 퀵 디스크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빠른 대신 디스크가 불안정해 내용이 자주 손상됐어요. 백업 디스크를 미리 준비 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전 날 너무 탈진해 잠들어 버린 것이 후회됐죠. 손상된 디스크가 다시 돌아올 리 없건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로딩을 되풀이 하는 동안 15번의 노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어요. 난 모든 준비를 멤버들에게 일임하고 작살 난 디스크만을 만지고 있었어요. 그 상황이 되자 성당에 안 나간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번개 같이 주기도문, 성모송, 사도신경을 암송한 뒤 ‘30년 내로 성당 하나 지어드리죠’라는 아부성 멘트를 날리고 키보드를 있는 힘껏 움켜잡은 뒤 온 정신을 집중 해 디스크를 다시 넣었어요. 당시 평생에 그렇게 강렬히 집중해 본 적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자 'loading'이라는 사인이 보이고 사운드가 입력되었어요.”
그 외의 대학가요제 에피소드에 대해
“우린 사실 별로 긴장하진 않았어요. 수천 명의 관객이 모이는 진짜 공연에서 무려 오프닝 밴드씩이나 해본 것은 우리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거기에 단독 공연의 경험도 있었으니까요. 예선 때 1절이나마 끝까지 연주한 팀은 우리를 포함해 2-3팀에 불과했고 심한 경우에는 네 마디 만에 '땡' 하고 벨이 울리는 경우가 있었고 반사회적인 복장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두 마디 만에 울리기도 했죠. 3차 예선을 통과 하자 우리는 1-3차 예선을 모두 1등으로 통과 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들떴어요.
결선에 진출하게 되자, 우리는 담당 프로듀서에게 따로 불려갔는데 이 사건은 참가자들이 약간의 의심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근데 사실은 정반대였죠. 1987년에 6.29선언 이후에 있던 1987년 대학가요제 결선 참가자들이 단합하여 합동 뮤지컬 공연을 거부한 적이 있었어요. 그 보복으로 MBC는 행사 자체를 아예 축소해 버렸는데 올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 그 주모자는 틀림없이 무한궤도일 것이라고 지목 되어 ‘개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왔던 것이죠.
결선은 12월24일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있었는데 당시 날씨가 아주 추웠어요. 그런데 PD들은 방송에 나갈 인서트 화면을 찍는다고 눈밭에서 굴리고, 썩은 미소 띄우며 나뭇가지 붙들고 재롱을 떠느라 전날 밤 멤버 전원이 고열과 복통, 설사,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어요. 다들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무도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몸살은 났지, 배에 힘은 없지, 목은 쉬었지, 빽빽 소리 지르고 노래 해봐야 내 목소린 하나도 안 들리지, 정말 최악의 무대였어요. 당시 우리 보고 무대매너가 너무 노련해서 아마추어 같지가 않다는 평이 있었는데 아마 몸살 안 난 상태였으면 날아 다녔을 거예요.
우리가 할 때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관객들은 지쳐 있었지만 우리가 시작하자 체육관 전체는 완전히 우리 것이 되었어요. 200명쯤으로 추산되는 친구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바람을 잡았고 첫 공연 이후 결성되어 있었던 수십 명의 소녀 팬클럽도 가세했으며, 또한 운이 엄청 따랐던 게, 당일 날 체육관에는 88올림픽 때 사용했던 조명 시스템이 아직 렌탈 기간이 남아 있어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앞선 15명의 발라드 참가자들이 노래하는 동안 심심해서 하품을 하고 있던 조명 기사가 신났는지 모든 조명 시스템을 풀로 올려 버려 마치 이 행사의 메인 이벤트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어요. 당시 심사위원장은 조용필 전하였는데 앞 참가자들 순서에서는 졸다가 우리 음악의 전주를 듣고 알람시계로 착각해 깨어났는데 나중에 보니 기억나는 게 우리밖에 없었데요. 그래서 우린 주병선을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대상을 받았어요. 끝나고 대기석으로 돌아가는데 관객석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체육관 바닥 쪽으로 넘어 들어오며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고 소동을 부렸고 경비원과 경찰들이 우리 쪽으로 뛰어 왔어요. 순간 기시감이 들었고 ‘대상이다. 해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강변 가요제 출전 당시 이상은이 대상을 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는데 결선까지는 거의 구색용 노래 분위기였다가 당일 날 관객들이 열광하고 이상은에게 소녀 떼들이 몰려들어 난리를 치자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이상우가 금상으로 떨어졌던 기억이 났어요.
사회자 이택림이 대상을 외치는 순간 껑충껑충 뛰었던 사람은 내가 아니고 베이스 조형곤이예요. 머리 스타일과 복장이 거의 유사해 나였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나는 매우 거만하게 터벅터벅 무대 위로 밴드의 맨 뒤에 서서 의당 받을 걸 받는다는 표정으로 걸어 나갔어요.
트로피를 들고 집에 오자 불이 꺼져 있었고 초상집 분위기였어요. 부모님 두 분은 인생만사 새옹지마라고 내가 상을 탄 것이 내 인생 말아먹을 흉사의 조짐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왔어요, 저 대상 탔어요”, “그래 TV 봤다. 수고 했더구나. 자라”, “네” 이게 MBC 대학 가요제 대상 수상 및 1회 이래 십 수 년만의 밴드 수상에 대한 울 엄마 아빠의 공식반응 이예요. 다른 집은 예쁘다고 뽀뽀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사줬다는데...”
정식 앨범을 내기 전에 정석원이 영입된 것에 대해
“1차 예선에 나가보니 정말 장관이었어요. 참가한 그룹들은 당시 우리나라 밴드들의 종류별 콜렉션 같았죠. 주력인 대학 서클들 외에도 울트라 장발, 가죽 잠바, 가죽 팔찌, 카우보이 부츠 등으로 무장한 메탈 밴드도 있었고, 자주색 배 바지, 깃토 와이셔츠, 도끼 빗, 닭대가리 파마를 한 펑크 밴드, 40대의 얼굴로 완전 뽕짝을 한 연주 팀, 가장 인상 깊었던 팀으로 널뛰기 모션을 하며 강강수월래를 부른 밴드 등이 있었는데 그 중 서울대에서 왔다는 괴상한 3인조가 있었어요. 재즈도 아닌 가요도 아닌 골 때리는 곡을 연주했는데 밴드 이름이 실험실이었고 <바벨2세>에 나오는 요미와 흡사한 키보디스트가 피아노 연주로 관객들을 죽이고 있었죠. 그의 이름이 정석원 이었어요.
우리는 대상을 받고 난 뒤 한 20여개의 기획사에서 콜을 받았는데 거의 대부분 나의 솔로 앨범에 관한 건으로 접근한 거였죠. 그러다 심사위원이었던 조용필의 소개로 유재학을 만났고 유재학은 우리가 밴드로 가겠다는 것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아 소속사와 제작자의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소속사 다음으로 우리가 고민했던 문제는 팀 전력의 강화 문제였는데 시퀀서를 도입해서 사운드를 더 증폭하는 것 보다는 라이브 키보디스트를 한 명 더 영입하고 싶었어요. 물론 세 명의 키보드라는 시스템에 대해 반대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누가 ‘레너드 스키너드(Lynard Skynard)는 쓰리 기타로도 하던데’ 라고 말함으로서 회의가 끝나버렸죠. 그래서 친구들을 수소문 끝에 당시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유학을 와 있던 정석원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이미 그 친구의 연주 실력을 보았기 때문에 잘됐다는 생각으로 만났죠. 정석원은 우리나이 또래에서는 드물게 코드 변환, 전조, 텐션 변화에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배킹형 키보디스트로, 견고한 팀플레이에 주력하는 조현문이나 리드 플레이를 주로 맡는 김재홍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 이였어요. 당시는 공일오비 후기의 신경질적이거나 깐깐한 캐릭터는 아니었었고 상당히 착하고 상냥하고 팀 성원들과도 잘 어울리며 서포트 해주는 친구였어요.”
대학가요제와 그대에게가 본인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대학가요제를 교훈으로 삼고 있는 것 하나는, 제가 음악을 하면서 여러 가지 기복이 있었는 데도 지금까지 살면서 음악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게 대학가요제가 진행 중이었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던 음악 방향을 많이 포기하고서라도 어떻게든 데뷔를 하고 싶다는 얄팍한 마음에 출전한 건데요. 도저히 분위기가 동상도 우리에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때는 음악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마음 고생하던 기억이랑, 두근거리던 기억이랑 그런 것들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그 당시 연주하던 모습을 보면 ‘운들이 더럽게 좋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당시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받고 무한궤도는 사회적으로 많은 화제를 일으켰지만 그대에게 자체는 히트곡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노래가 이토록 오래도록 살아남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어요. 제가 20년 넘게 활동하면서도 히트곡이 계속 나오는 데도 이 노래는 결코 안 사라졌으니까요. 내가 데뷔를 했을 때는 이 노래가 대학가요제에 권리가 있는 곡이라서 제작사 측에서는 일부러라도 죽이려고 했던 곡이였어요. 그래서 전혀 홍보를 하지 않았죠. 근데 이 노래는 점점 더 유명해져서 지금은 이 노래가 무한궤도나 신해철 노래인 거는 몰라도 응원가로서의 그대에게는 다 안다는 거죠. 참 즐거운 상황이예요. 어떻게 보면 작곡가는 가창자나 작곡가를 모르더라도 사람들이 그 노래를 아는 상태가 가장 영예로운 상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일 정이 가는 노래로 꼽은 것에 대해
“원래 사랑하지 않았어도 어떻게 살다보니 정이 드는 거 있잖아요. 그대에게가 그런 곡이에요. 평생 살면서 그렇게 작전까지 짜서 만든 노래는 없었으니까요. 한 번은 공연장에서 안 부르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우려먹기 그만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래서 한번은 앙코르에서 안 부르고 공연을 끝냈어요. 근데 그랬더니 관객들이 또 앙코르를 하더라고요. 심지어 쓰리 앵콜을 했어요. 그러다 지쳐서 '아, 나도 집에는 가야겠다' 해서 그대에게를 불렀죠. 그랬더니 그렇게 앙코르 하던 사람들이 다 집에 가더라고요.”
20141029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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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순 없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 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1990s/1990] -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 신해철
[1990s/1991] - 내 마음 깊은 곳에 너 - 신해철
[1990s/1991] - 나에게 쓰는 편지 -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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