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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s/1991

임을 위한 행진곡 - 노래를 찾는 사람들 / 1991

by Rainysunshine 201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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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제창곡이다. 재야운동가 백기완(19320124 ~20210215)이 1980년에 발표한 시 묏비나리에 기초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만들고 5.18 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전남대 학생 김종률이 작곡했다. 백기완은 여러 매체에서 "내가 만든 노래가 아니라 모두의 노래이므로 저작권을 내가 가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 베트남, 중국, 필리핀 라오스 등의 나라에서 개사하여 부르고 있다. 제도권에서는 대한민국 민중가요 그룹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1991년 3집에서 처음으로 발표했고 2008년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 뮤지컬 준비를 위한 음반 <님을 위한 행진곡>에서 서영은이 불렀다.

 

이 곡은 시국사건으로 대학에서 정학을 당하고 공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박기순 박기순 사후에 들불야학을 이어서 운영하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을 위해 기획한 음악극 <넋풀이 - 빛의 결혼식> 수록곡이다. 처음 녹음한 버전은 전남대 학생 오정묵(오창규)이 불렀다. 오정묵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황석영씨의 운암동 자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선배 윤상원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범벅이 되어 노래 연습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한 원본은 기독청년협의회가 2천개를 복사해 배급했다.

 

오정묵은 "행진곡은 4박자이면서 힘차죠. 그래서 군가를 들어보면 대개 4박자예요. 누구나 부르기 쉽고 편하고요. 그러나 같은 행진곡이지만 이 곡은 애수와 비장미, 페이소스가 강하게 느껴져요. 노랫말의 힘도 한 몫 하고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노랫말 이예요"라고 말했고 "우리는 1980년의 비극을 되돌아보면서 또다시 자문할 수밖에 없어요. '죽음을 예견하고도 끝까지 몸을 피하지 않았던 임들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 정신은 촛불광장에서 목이 터져라 '박근혜 탄핵'을 외치고 이 곡을 부르던 시민들의 정신과 맞닿아 있을 거예요. 민주정부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정신이 이 곡의 정신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김종률은 "보통 전통적인 행진곡은 장조의 밝은 곡으로 나가잖아요. 그런데 비장함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단조로 만들었어요. 당시에는 이런 생각 자체가 획기적이었던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종률은 2019년 5월 15일 광주 동구청 강연에서 "이 곡은 총칼보다 강한 노래예요. 이 곡을 작곡하면서 한 곡의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5·18 직후 참상을 목격하고도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 빠진 많은 광주시민들이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1982년 4월 중순 황석영의 광주 자택 2층에 문화예술인이 모여 오월 광주에 대한 책무를 다하자며 노래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시 용기를 얻었어요. 이 곡은 영혼결혼식을 다룬 노래극에 들어갈 7곡 중 극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곡이예요. 황석영씨가 서재에서 책 한권을 꺼내와 쓴 글이 곡의 가사가 됐죠. 이 곡은 5·18과 민주화를 상징하는 민중가요의 효시이자, 독재와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열망한 노래"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82년 2월 20일인가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지키다가 돌아가신 윤상원씨와 1979년에 노동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이 있었어요. 한 분은 민주화항쟁 과정에서 돌아가시고 한 분은 노동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셨지만 두 분 다 전남대를 다니시고 노동야학을 함께 하면서 서로 알고 있던 사이라서 가족끼리도 아니까 영혼결혼식을 시키자 그러셨다고 해요. 친지 가족만 망월동 묘지에 와서 진짜 결혼식처럼 이뤄졌어요. 그걸 광주에서 문화운동하는 이들이 뒤늦게 알고 당시 광주 문화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황석영씨 집에 모여서 '영혼결혼식도 결혼식인데 우리가 축하를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논의를 했어요. 우리는 가진 것이 음악하고 문학이니까 이걸로 노래극 테이프를 만들게 된 거죠. 10여명이 모였고 작곡은 제가 하기로 했어요. 창도 나오고 비나리도 나오고 꽹가리, 징이 등장했어요. 양악기라고는 제가 들고간 기타 하나였죠. 그것들을 가지고 1박2일 녹음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바로 그날 모여서 전격적으로 한 거죠. 제 기억에는 1982년 4월인데 어떤 분은 5월이라고도 해요. 노래극에 쓰인 곡은 모두 7곡이고 6곡은 제가 이미 작사, 작곡해 놓은 것을 조금 바꾸기도 하면서 완성했고 오직 임을 위한 행진곡만 바로 그날 밤에 작곡했어요. 영혼결혼식이 끝나고 용기를 잃고 풀죽어 있는 후배들한테 두 분이 불러주시는 노래로 기획되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전체가 다 합창하기 때문에 제목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이 노래의 앞부분 네 소절은 제가 그 해 초부터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거라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어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산천은 안다'로 할까, '운다'로 할까하고 가사를 의논 중이었고요. 제가 그렇게 재주 있는 사람이 아닌데 두 분에 대한 존경과 모든 분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뭉쳐져서 폭발적인 곡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절절했어요. 2층 거실에 조그만 카세트를 놓고 방음도 되고 보안도 되게 창문은 군용담요로 막고 작업을 했어요. 아주 열악했죠. 지금도 원본테이프를 들어보면 개짖는 소리도 들리고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고 그래요"라고 말했다.

 

원래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하지만 문법적으로는 두음법칙(ㄴ과 ㄹ이 첫 음으로 오기를 꺼리는 현상)에 따라 "님"을 "임"으로 바꿔야 한다. 김종률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작곡 당시 고귀하고 숭고한 느낌을 주기 위해 '님'으로 정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시 님의 침묵도 참고했고요. 시적 표현으로 인정해줬으면 합니다"라고 말했고 "'깨어나서 외치는'으로 부르는데 원래는 '깨어나 소리치는'이고요. '앞서서 나가니'도 오리지널은 '앞서서 가나니'였습니다. 가사도 부르기 쉽게, 음도 약간은 편하게 바뀌었지만 그 외에는 바뀐 게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임'으로 더 많이 표기하고 있는 추세인 것 같다.

 

현지운 rainysunshin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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